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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Oct 15. 2021

당신에게 취미를 권합니다.

엄마들의 우아한 취미생활


매주 목요일 아침이면 초인종이 바쁘게 울린다. 서둘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하나 둘 들어오는 엄마들. 핸드밀에 곱게 갈아 내린 커피 한 잔을 차례로 내어주며 오래된 나무 식탁에 둘러앉는다. 언제나 그렇듯 배경처럼 흐르는 재즈, 창가에는 한 줄기 흰 연기를 하느작거리며 피워낸 인센스의 이국적인 향기가, 계절을 모르고 늘 푸릇푸릇 잎사귀를 내고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우리를 둥그렇게 감싸 안는 나의 공간, 나의 집이 '우리'의 공간이자 우리의 집이 되는, 조금은 비현실적인 시간이다.  



아이들은 학교에 들여보내 놓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브런치를 즐기는 엄마들의 흔한 일상 이야기 같지만, 이 모임은 조금 특이하다. 브런치는커녕 끼니를 거르기도 일쑤고, ‘모임 룩’이라 불리는 꾸민 듯 안 꾸민 스타일에 명품백 하나 들어주는 센스는 무슨, 세상 제일 편한 옷에 화장기 없는 민낯으로 마주 앉은 여인들. 아이들에게 요즘은 어떤 교육을 시키고 어느 학원에 보내고 무슨 학습지가 좋다더라는 말 따위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아니, 아이들이나 남편, 시댁이 대화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오롯이 ‘나’와 ‘우리’만 존재하는, 아주 이상한 엄마들의 모임이다.



두 아이를 키우며 대학원 공부에 인턴 생활까지 병행하고 있는 엄마, 결혼 초에 갑자기 맞닥뜨린 우울과 공황을 상처처럼 안고 살아가던 엄마, 암세포와 싸워가며 연년생인 세 아이를 돌보느라 스스로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엄마, 어딘가 비밀스러운 구석 하나는 남겨둔 것 같은 밝음과 어두움의 애매한 경계에 선 엄마까지, 공통점이라곤 1학년 꼬마들을 같은 학교에 보낸다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은 여인들의 모임. 저마다의 자리에서 종종종 하루하루를 애달프게 버티고 있던 여인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모여 앉았을까.  



시작은 꽃이었다. 내 손에, 혹은 집안 곳곳에 놓인 꽃을 바라보며 부러운 듯 ‘저도 꽃꽂이 같은 거 한 번 배워보고 싶었는데......” 하고 말끝을 흐리던 엄마들의 눈빛이 아른거렸다. 보드라운 꽃잎에 번져가는 다채로운 색감, 하느작거리는 줄기와 잎사귀를 다듬어낼 때마다 손끝에 물드는 초록의 내음을 같이 느끼고 싶어 서재에 꽃을 가득 채우고 그녀들을 초대했다. “여러분, 내일은 아주 특별한 약속이 있는 것처럼 한껏 꾸미고 예쁘게 화장도 하고 오세요.” 나를 위해 꽃을 사는 일도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데 스스로 꽃을 만지고 꽂고 예쁘게 장식하는 일은 선뜻 시작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육아와 일상에 이미 지쳐있는 엄마들에게는 더더욱. 굳이 비싼 수강료를 내지 않아도 마음만 있으면 이렇게 집에서도 얼마든지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일상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귀띔해주고 싶었다. 소녀같이 설레는 표정으로 들어와 “우와!” 탄성을 지르고 말던 그녀들의 얼굴이, 방 안 가득한 꽃향기에 취해,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과 갓 내린 커피 향에 반해 스르르 감기던 그녀들의 눈꺼풀이 봄처럼 피어났다.  



꽃가위를 들고 줄기를 톡톡 자를 때마다 알싸하게 퍼져가던 풀내음, 화병에서 꽃 한 송이 집어 들 때마다 흔들흔들 스며드는 달큰한 꽃향기, 자그마한 바구니에 흘러넘치도록 담아낸 소담스러운 꽃무리를 품에 안은 그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어색한 건 잠깐이지만 사진은 평생 남습니다, 여러분.” 나의 한 마디에 수줍게 흰 벽 앞에 선 그녀들이 웃는다. 바쁘게 셔터를 누르며 담아낸 사진들을 그녀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 한참 동안 혼자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행복으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들 위로 토독토독 떨어진다. 이토록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녀들을 마주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토록 빛나는 미소를 가진 그녀들이 그동안 엄마라는 이름에만 갇혀 있었다니, 특별할 것 없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 묻혀 있었다니, 얼굴 가득 그녀들을 닮은 미소를 한껏 짓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꽃을 안고 꽃처럼 웃던 우리의 봄날


“이번엔 우리 그림 그려요.” 하루는 책상 가득 오일파스텔을 꺼내 두고 가장 좋아하는 색깔들을 골라 흰 종이에 마음 가는 대로 채워보는 놀이를 시작했다. 유월의 푸른 초원,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꿈꾸는 그녀의 손이 바빠진다. 어딘가 늘 지쳐 보이는 그녀 안에 붉은빛 노을 닮은 열정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이 또 다른 그녀의 손끝에서 살아난다. 어릴 때 가지고 놀던 크레파스와 꼭 닮은 오일파스텔은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아주 좋은 도구다. 부드럽게 발리고 슥슥 문질러 예쁘게 색을 섞는 모든 순간, 어느새 방 안에는 새근새근 숨소리에 조용한 음악만 슬며시 얹혀 흐른다.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몸은 일상에 꽁꽁 묶여있을지라도 마음은 언제든 호로록 날아오를 수 있도록 나만의 작은 창을 짓는 순간들. 모두가 행복했다.



커다란 이젤에 캔버스를 세우고 ‘밥 아저씨’가 되어보던 날, 새하얀 캔버스 앞에 멈칫하는 그녀들 곁에서 나이프로 아크릴 물감을 듬뿍 떠서 처억 바르며 말했다. "참 쉽죠?"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과 함께 부담으로 팽팽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진다. 두툼한 물감이 손목의 움직임을 따라 으깨지며 선과 면과 색이 자유로이 섞이고 덮이는 순간순간의 우연한 기록들이 작품으로 태어난다. 한참을 자유로이 칠하던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고 두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나 진짜 울어도 돼요? 세상에, 내가 이걸 완성하다니!" 그녀의 기쁨은 나의 감동이었고 우리의 즐거움이었다. 우린 한마음이 되어 서로의 작품을, 새로운 도전을 조금은 격양된 목소리로 응원하고 칭찬하고 축복했다.



어떤 날엔 대학원에서 음악 치료를 공부하고 있는 엄마의 주도로 서로의 인생 곡을 나누며 내 삶의 인상적인 한 조각들을 나누기도, 또 하루는 아로마 테라피스트였던 엄마의 주도로 서로의 마음을 향기로 읽어내며 달래기도 했고, 어느 여름날엔 돌아가며 피아노 앞에 앉아 즉흥 연주회를 선보이기도 했다.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은 우리의 모임은 그렇게 다양한 색깔과 소리와 향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반짝였고, 각자의 삶에 아주 조금씩 생기와 활력과 기쁨을 불어넣었다. 무료한 일상이 켜켜이 쌓이는 동안 사라져 버린 우리 안의 소녀들이 다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쭈뼛쭈뼛 1학년 꼬마들을 교문 앞에서 배웅하다 우연히 마주한 어색한 사이였던 우리는 어느덧 서로의 꽤 깊은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다정한 벗이 되었고 든든한 친구가 되었으며 살가운 이웃이 되었다. 내밀한 취향을 공유하는.


음악과 사연과 눈물 콧물이 어우러진 음악치료모임의 현장


“우리 사랑이가 요즘 엄마가 달라 보인대요. 무슨 새로운 희망이라도 생긴 거냐고 묻더라니까요.” 어느덧 우울의 무게를 벗어던진 그녀가 이야기한다. “저는 제 얘기를 이렇게 오롯이 나누어 본 게 아마 결혼하고 처음인 것 같아요.” 일상을 버텨내기도 힘든 것 같았던 그녀도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이야기한다. “저는 요즘 어디 가서 그림을 보면 달리 보이더라고요. 나도 한 번 그려볼까 하는 생각부터 들지 뭐예요.” 지난한 일상에 사소한 취미 하나씩이 더해지고 마음 기댈 친구들이 더해지니 엄마들의 삶이 은은하게 반짝인다. 하루에도 수 백 번씩 엄마를 찾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음도 어쩐지 조금 너그러워지고, 툭하면 부딪치던 남편을 바라보는 눈길도 조금은 부드러워졌으며, 무엇보다 거울 속 나 자신을 바라보며 조금은 뭉클한 마음으로 웃어줄 수 있는 정도의 여유가 생겼달까.  



나의 무료한 일상을 채우던 우아한 취미생활은 이제 우리의 우아한 취미생활이 되었다.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보다 아름답고 풍요롭게 변화시킬 수 있음을 곁에서 바라보는 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이자 행복이다. 엄마가 그린 그림 한 조각을 바라보며 아이도 캔버스에 물감을 발라보고, 아내가 주문한 커다란 꽃 상자를 부부가 함께 열고 마주 앉아 줄기를 다듬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각자의 공간에서 소소한 행복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걸 바라본다. 내 삶을 채운 작은 기쁨들이 퐁퐁퐁 흘러넘쳐 내 곁을 촉촉하게 적시는 아찔하게 아름다운 날들, 이토록 행복하고 감사한 순간들을 살아가며, 나는 오늘도 다음 모임에선 어떤 '놀이'를 함께 하면 좋을까 하는 즐거운 고민에 푹 빠져본다.



"삶이 무료한 당신, 일상이 버거운 당신에게, 빛나던 자신을 잃은 당신에게 취미를 권합니다. 실수해도 괜찮고 잘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저 마음속 저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었던 그 무언가를 찾아 시도해 보세요. 혼자만의, 어쩌면 누군가와 함께 하는 그 짧은 순간이 우리의 마음을, 일상을 얼마나 반짝이게 하는지 알게 되실 거예요. 행복이 얼마나 작은 곳에서부터 피어날 수 있는지도요. 당신의 지난한 일상에 취미가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나기를, 당신이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엄마들의 취미생활은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쉬이 전염이 되었다. 이제 당신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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