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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Oct 22. 2021

꽃을 든 여자

내 마음에 피어난 꽃, 네 마음을 피우는 꽃

"어머나, 이거 직접 만드신 거예요? 아이고. 너무너무 예쁘다. 참 좋은 시절이네요. 얼마나 좋아요."


새하얀 머리에 고운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꽃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시는 이웃 할머니의 모습이 어쩐지 뭉클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후에도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시던 그 모습. 꽃을 바라보는 여자들의 마음은 늘 비슷하다. 경이와 감탄과 행복, 그리고 그 뒤로 살짝 비치는 부러움과 아쉬움과 약간의 쓸쓸함. 제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한들 얼마간이 지나면 이내 시들고 말라버리는 것에서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기라도 하는 걸까. 꽃은 언제나 여자들을 뭉클하게 한다.



꼬마 아가씨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꽃이 많은 우리 집에 오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감탄과 부러움을 쏟아낸다. 나와 조금 가까워진 아이들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수줍게 조르기도 하고. "이모! 저도 봄이처럼 플로리스트 수업해보고 싶어요! 꽃 만들기 하고 싶어요!" 그 예쁜 눈망울을 보며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이 방 저 방 꽃병에 꽂혀있던 꽃을 끌어모아 아이들을 위한 조그마한 꽃 수업을 시작한다. 어린이 가위를 손에 쥐고 조심조심 꽃을 집어 들어 향을 맡아보기도, 꽃잎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는 아이들은 어느새 꽃의 요정이라도 된 듯 조용하고 곱게, 그리고 향기롭게 피어난다.


봄이와 친구들의 즉석 꽃놀이, 제법 진지한 여덟살 꼬마 플로리스트들.


"어머님! 화장 예쁘게 하고 계세요. 며느리가 이번에 특별한 이벤트 하나 준비해 갑니다!" 시댁에 내려가기 전 인터넷 꽃시장에서 미리 예쁜 꽃들을 한가득 주문해 두었다. 배송지는 시댁. 사람 키만큼 커다란 택배 상자에 놀란 어머니는 집안 곳곳에 있는 화병(으로 쓸 만한 물건들)을 모두 끌어모아 꽃을 다듬어 꽂는 나를 보시더니 스르르 방으로 들어가 소녀스러운 리넨 원피스를 꺼내 갈아입으시고는 붉은빛 립스틱을 바르신다. 평생을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셋과 살아오신 어머니의 마음에 숨어있던 소녀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순간. "아이고. 이런 항아리랑 꽃병은 어디서 이렇게 잘 찾아왔노. 야야, 이대로도 너무 예쁘다." 꽃보다 더 활짝 피어나는 어머니의 얼굴에도 행복이 일렁인다. "이거 완성해서 이모네 갖다 주자. 이모도 너무너무 좋아하겠다, 야야." 만드는 기쁨에 선물하는 즐거움이 더해진다. 나의 행복이 너에게로 옮아가서 새로운 꽃을 피우는 이 순간들이 너무도 아름답고 소중하다.


시어머니의 마음 속 소녀가 깨어나던 어느 여름 날


누군가는 '예쁜 쓰레기'라고 말하는, 줄기가 잘리며 생명을 잃은 꽃, 절화. 가장 아름다운 순간 내 품에 안겨 짙은 향기와 설레는 빛깔과 고운 질감을 물들이고 꿈결처럼 사라지는 모습은 어쩌면 서글프다. "예쁘다. 곱다."를 읊조리는 목소리 뒤로 묻어나는 이웃 할머니와 시어머니의 쓸쓸한 기운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겠지. 어린 시절 마냥 아름답고 행복한 지금만이 내 세상의 전부이던 그때는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어지러이 스쳐간다. 꽃을 바라보는 당신들의 눈동자에서 배우게 되는 삶의 덧없음, 그리고 꽃처럼 피어나는 아이들의 보송한 뺨에서 배어나는 작은 생명의 아름다움, 그 가운데서 매일매일 같지만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나와 당신과 우리의 지금 이 순간.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예정된 이별의 순간들을 향해 걷고 있는 모두의 삶, 인생......


흙 속으로 뿌리내린 식물들을 돌볼 땐 느낄 수 없는 삶을, 생명을 잃은 채 물속에 꽂혀있는 꽃을 통해 바라본다. 이미 '꽃 같은 시절'은 다 지났다며 쓸쓸하게 웃어 보이는 당신의 눈동자에서 여전히 새롭게 피어나는 꽃을 본다. 자신이 꽃인 줄도 모르고 이 꽃들은 어쩜 이렇게 예쁘냐며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에서 앙다문 겉잎을 밀어내고 피어나는 말간 꽃잎의 속살을 본다. 이내 버려지는 꽃이라고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매일 화병을 닦아 새 물을 채워주고 줄기 끝을 잘라주며 상한 잎을 다듬어내면 좀 더 오랫동안 아름다운 모습으로 곁에 머물 수 있음을 배워가며 나와 당신과 우리를 본다.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지금 이 순간의 우리를 본다.



기쁜 일,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꽃을 선물하기 때문일까. 꽃에 대한 기억은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 중에는, 나 자신을 위해서는 더더욱 꽃을 사는 일이 망설여진다. 하지만 행복은 이토록 작은 것에서 시작되는 법, 오롯이 나를 위해 이 아름다움을 선택하고 느끼고 즐기는 순간을 마주할 때면 내 마음도, 아니 우리 모두의 마음이 경이와 감탄과 행복으로 차고 넘친다. 예정된 헤어짐의 아쉬움마저 쌉싸름한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너른 마음이 된다. 이만하면 일상 속 조그마한 사치를 한 번씩은 눈감아 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의 행복은 우리를 더욱 기쁘게 할 테니. 아내, 집 안에 있는 해와 같은 엄마의 마음이 반짝반짝 따스하게 빛날 때면 가족들의 마음에도 봄볕 같은 행복이 차오를 테니. 오늘도 나를 위해 꽃을 산다. 당신을 그리며 꽃을 다듬는다. 우리를 위해 꽃을 꽂는다. 당신의 일상에도, 그대의 마음에도 꽃이 피어나기를.


당신의 일상에, 그대의 마음에 꽃이 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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