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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Dec 18. 2020

촌스럽게, 손편지를 쓰는 중입니다.


흘러간 인연에 집착하지 않겠다 선언하듯 글을 쓴 뒤, 내 삶에 남아있는 인연들에 대해 가만히 돌아보게 되었다. 잘 숙성된 와인처럼 시간의 향기를 머금고 내 안에 녹아든 오랜 인연들,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첫 만남부터 오랜 친구처럼 마음이 통했던 신비로운 인연들, 그리고 한 입 베어 물면 입안이 초록빛으로 물들 것만 같은 싱그러운 기운이 감도는 새로운 인연들... 그중 요즘 나의 마음속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무는 자리는 ‘얼굴 없는 인연들’이다.



실존하는 내가 아닌, 내가 창조해 낸 세계와 작품들 사이로 나의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들, 대단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 아님에도 공감하고 감탄해주는 사람들, 나의 수고로운 정성을 고마운 마음으로 알아봐 주는 사람들 말이다. ‘돌아오지 않는 마음’에 대해 투정하듯 글을 내뱉었지만, 사실 요즘 내 곁에는 내가 채 찾아가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나에게 다정하고 따뜻함으로 먼저 다가와 주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다. 그래서 나는 요즘, 촌스럽게, 손편지를 쓰고 있는 중이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오롯이 그 한 사람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고 오브제를 만들고 글을 쓴다. 바쁜 일상을 핑계 삼아 이 마음을 슬그머니 미뤄두지 않으려 내 나름대로의 기한을 정했다. 크리스마스 전에 이 마음을 닿게 하는 것. 손과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by 언제나, 봄



그림을 구입하시는 분들께는 늘 직접 그린 카드와 손편지로 감사의 마음을 실어 보냈다. 한결같은 반응은 ‘얼마 만에 받아보는 손편지인지’, 나이도 얼굴도 모르는 인연들의 칭찬과 감동은 그 무엇보다 기분을 둥실 떠오르게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들이 남겨준 후기를 다시 읽어보고, 그들의 공간에 어우러진 나의 그림을 사진을 통해 마주한다. 휴대폰 메시지로, 때론 투박하지만 꾹꾹 눌러쓴 손편지로 돌아오는 마음들은 나를 다시 빛나게 한다. 몇 편 되지 않는 브런치의 글을 통해 위로와 공감을 주고받으며 연대가 형성되고 있는 독자분들 또한 그러하다. 모두의 자아는 조그마한 동그라미 속 사진 혹은 이미지와 자신이 설정한 별명 뒤에 감추어 있지만, 오롯이 글과 마음으로만 소통하고 있는 이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늑함은 계속해서 내가 무언가를 쓸 수 있도록 부드럽게 채근한다.  


늘 고맙고 설레는 후기들


‘첫 작품’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느낌이 있다. 조금은 서툴고 투박하고 어딘가 어색하지만, 마음과 정성을 한껏 담아낸, 풋풋하고도 따스한 느낌. 그게 나의 작품일 땐, 부끄러워 슬그머니 뒤로 숨기고 싶기도 하고, 칭찬받고 싶은 아이처럼 스윽 내밀어 관심을 끌고 싶기도 한, 두 마음이 티격태격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다른 사람의 그것은 마냥 예쁘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귀여운 아기를 바라보듯 흐뭇한 미소가 슬며시 떠오르는 기분. 내 작품을 그런 눈으로 보아주며, 자신의 첫 작품을 선물로 보내온 소중한 인연들이 있다. 물론 일면식도 없는, ‘얼굴 없는 인연’이다.



자신의 첫 번째 출간 도서를 선물로 보내온 한 작가님은, 나의 브런치 글 <아무도 읽지 않는다>를 보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자신도 똑같은 상황과 마음이었다며. 얼마 후 그분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를 전해왔다. 내 책을 읽고 모든 챕터마다 마음을 울렸던 한 마디를 정리한, 짧지만 소중한 글이었다. 함께 출간한 작가들에게 전해주자 그 마음이, 감동이, 일곱 배로 불어났다. 나의 글이 얼굴 모르는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반짝였다는 걸 알게 되는 설렘과 기쁨, 약간의 묵직한 책임감 같은 것들이 어우러진, 먹먹한 순간이었다.

모두에게 따뜻했던 순간들


손으로 밀랍 초를 빚으며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중이라는 한 독자 분은, 아직 출시도 되기 전의 따끈따끈한 초를 선물로 보내왔다. 몇 편 되지도 않는 나의 글을, 서랍 속 숨겨둔 초콜릿처럼 하나씩 하나씩 아껴가며 열어보아 주는 그녀는, 늘 다정한 시선과 감상을 담아 마음을 전해온다. SNS로 연결된 만남에는 멈칫하고 경계하게 되는 나였지만, 한껏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그녀에게 마음 한 켠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 끝에서 만들어진 조그맣고 귀여운 친구들이 가녀린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모습들을 보며, 내 마음을 알아주는 한 사람, 나의 정성과 노력을 알아보아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어둑한 시간들도 캄캄한 마음들도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뒤를 밟았다>를 읽은 뒤 보내주신 그녀의 첫 작품


어디 그뿐이겠는가. 요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마음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하여, 나는 어제도 오늘도 손편지를 쓰고 있는 중이다. 고마운 인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더더욱 분주해지고 있다. 틈틈이 그림 주문이 들어와 다른 작업을 겸하게 되면서, 코로나가 창궐해 아이가 유치원에 가지 못해 엄마 역할까지 온종일 감당하게 되면서, 하루가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소란하고 분주하지만, 그 어느 때 보다 마음은 따뜻하고 즐겁다. 책상 위에 편지들이 쌓이면 한 번씩 우체국으로 달려가 마음을 실어 보낸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 나의 글과 그림을 받게 될 그분들의 겨울이 잠시나마 반짝이고 따뜻하기를, 서로의 마음이 닿은 곳에서 또다시 서로의 하루하루를 다독여주고 이해해주고 기억해주는 소중한 인연으로 오래도록 머무르기를 가만히 바라본다. 아직도 나는 촌스럽게, 손편지를 쓰고 있는 중이다.


메리크리스마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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