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제나봄 Sep 17. 2021

내 안의 소녀와 마주하는 시간

흙 빚는 엄마들의 고요한 취미생활


수요일 아침, 평소보다 서둘러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가을의 문턱을 넘어 제법 쌀쌀해진 아침 공기는 처음 그곳에 발을 내딛던 그때, 그 봄날의 아침과 꼭 닮아있다. 오늘은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세 번의 계절을 지나는 동안 수요일 아침마다 얼굴을 마주하던 사람들과의 마지막 모임이 있는 날이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데, 스무 명의 엄마들이 모인 강의실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수많은 강의들 가운데 굳이 ‘도예’를 선택한 사람들 이어서일까. 어딘지 모르게 소박하고 조용조용한 엄마들의 집합체. 벌써 세 번의 계절 동안 손에 꼽지도 못할 만큼 한 자리에서 만나고 있지만, “수업 마치고 차 한 잔 할까요?”라는 말이 한 번도 들리지 않는 이 모임은 어쩐지 특이하다 못해 특별하다.  



첫 시간에 앉았던 자리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고정석이 되어 모두가 고민 없이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다. 수줍게 눈인사를 나누며 앞치마를 꺼내 두르면 수업 준비 끝. 책상 위에 놓인 흙 한 덩이를 보며 오늘은 무얼 빚어볼까 구상한다. 아침 햇살이 조용하게 내려앉은 창가에 살랑살랑 보사노바 음악이 흘러나온다. 슬며시 눈을 감으면 회색빛 강의실에서 마음이 호로록 날아 햇살 가득한 프로방스의 아뜰리에 한 켠으로 옮겨간다. 코 끝을 간지럽히는 라벤더 향이라도 맡은 듯 가슴이 콩닥콩닥. 익숙한 멜로디가 나오면 조용히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어딘가에선 조심스레 발끝으로 박자를 맞추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손끝에 닿는 촉촉하고 말캉한 흙의 감촉이 참 좋다. 밀대로 판판하게 밑판을 다지고, 가늘고 기다랗게 흙을 빚어 감아올리는 작업은 참 간단해 보이지만 마음처럼 손이 따라주지는 않는다. 분명 찻잔을 빚고 있었는데 어느새 눈앞엔 투박한 라면 그릇이 나타나기도 하고, 꽃 한 송이 꽂을 늘씬한 화병을 구상했지만 꽃이 한 다발은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퉁퉁한 주병이 나오기도 한다. 이쯤 되면 여기저기서 피시식 배시시 한숨과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선생님, 도와주세요.” “저는 살려주세요!” 쏟아지는 SOS 요청에 선생님의 손과 발이 바빠지는 것도 이때쯤. 민망함에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 옆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우와. 대접 만드시는 거예요? 멋진데요?” “아... 녹차 마실 다기를 빚고 있었는데......” 소곤소곤 킥킥킥. 단발머리 소녀들로 돌아간 듯 여기저기서 도란도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유롭게 흙을 주무르고 모양을 매만지는 동안 무료했던 엄마들의 일상이 꽃으로 피어난다. 모양새와 완성도야 어찌 되었든 오롯이 내 손끝에서 창조된 하나하나의 예술품을 바라보는 엄마들의 눈빛이 아이처럼 반짝인다. 지난 시간 빚었던 작품에 그림을 더하고 색을 입히며 행복한 상상에 젖어든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접시와 컵, 주전자, 화병들이 놓인 우리 집 식탁을, 그것들을 선보이며 한껏 목에 힘을 주고 으스댈 엄마의 표정과 “이걸 모두 엄마가 만들었단 말이에요?” 하며 휘둥그레질 아이의 눈동자, 그리고 아내의 우아한 취미생활에 뿌듯하면서도 살짝은 질투도 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어 보일 남편의 얼굴을.  



찰나 같은 두 시간을 보내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간, 이 모임은 비록 이렇게 끝이 나지만 각자의 삶에서 하루 한 시간 정도는 이렇게 오롯이 스스로를 향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며 서로를 향해 한껏 웃음을 짓는다. 아마도 바쁘게 돌아가 하원 하는 아이들을 맞이하고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를 재우고 이내 또 하루를 시작하는 것으로 반복되는 일상은 이 순간의 약속을 쉽게 잊도록 만들겠지만,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이 저 여인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소곤대는 즐거움을, 자그마한 창작의 기쁨을 잠식해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바쁜 아침을 보내고 나를 위한 차 한 잔을 내릴 때, 두 손에 폭 안기는 투박하지만 따뜻한 찻잔을 스스로 빚어내던 순간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기를, 가만히 스스로를 마주하며 때때로 자기 자신을 보듬어주기를, 잊고 있던 꿈의 조각들을 소소하게 이어 붙이는 기쁨들을 찾아가기를. 가만히 등을 쓸어주며 토닥토닥 용기를 더해주고 싶다. 모든 엄마들의 마음속에 수줍게 숨어있는 소녀들에게.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작품들. 예술적인 것으로 우기기로!


이전 08화 아름답고 무용한 악기, 텅드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