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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Oct 23. 2021

아름답고 무용한 악기, 텅드럼

마음을 비울수록 아름다워지는 소리의 비밀

“우리 집에 많고 많은 무용(無用)한 것들 중에 가장 무용한 것이 생겼네. 하하하하하.”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거실 중앙에 떡하니 놓인 시커먼 솥뚜껑을 바라보며 웃는다. 이 무용한 것의 이름은 ‘스틸 텅드럼 (Steel tongue drum)’. 마림바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맑은 울림이 마음에 가만히 와닿는 악기다. 우연히 연주 영상을 보고 홀린 듯 주문해버린 이 악기, 모양은 정말 솥뚜껑이 따로 없다. 고무 말렛으로 통통 두드려보니 뼛속까지 청아 해지는 기분, 하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바로 음계의 위치다. 건반이 무려 88개나 있어도 낮은음부터 높은음까지 차례차례 순서대로 놓여있는 피아노는 눈 감고도 치건만, 겨우 15개뿐인 음계를 규칙을 알 수 없는 순서로 섞어 놓은 이 악기는 어쩐지 나를 골탕 먹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순서 때문에 갈 곳 잃은 두 손은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겨우 간단한 멜로디 라인 한 소절을 연주하는데도 말이다.  


이 배열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이름은 김보보, 어린 시절 우리 동네 모차르트로 피아노 신동 소리를 들었고, 지금까지도 -비전공자 중에서는- 나름 수준급의 실력을 보유 중인 재야의 피아니스트 아니던가. 이 정도 간단한 악기에 무릎 꿇을 수 없다. 자, 지옥의 훈련을 시작해보자. “도... 1... 미, 3... 시는 7이고, 솔은 5... 가 어디 갔나.......”  


머리로는 이미 다 알고 귀는 다 자라 고급이 되었는데 내가 연주하는 소리가 유려하지 않음은 혼자 있는 집에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마음을 평화롭게 달래는 소리에 끌려서 시작한 악기인데, 손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고 머릿속은 더더욱 복잡했다. 다 자란 어른이 되어 새로운 악기를 배우는 일은 언제나 그렇다. 흥미롭지만 괴롭다. 나에겐 감추어 둔 실패의 방들이 있다. 중국 유학시절 큰맘 먹고 시작했던 얼후와, '안빈둥낙도'의 삶을 추구하는 나에게 어울리는 소리라며 남편이 선물해주었던 우쿨렐레가 그 방의 주인이다. 제대로 연주하지 않으면 끼익 끼익 듣기 힘든 쇳소리를 내고, 피아노와 달리 왼손이 주가 되는, 게다가 현을 누를 때마다 손끝에 피가 맺히는 것 같은 아픔까지 여러모로 견디기 힘들어 금방 포기해버린 악기의 무덤들. 여기에 텅드럼을 더하고 싶지 않다. 아직까지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의 인센스를 피우고 자세를 고쳐 앉아본다. 오. 향의 힘인가, 며칠 연습의 결과인가. 머릿속에 떠다니는 음악의 좌표를 손이 읽기 시작한다. 조절할 수 없이 퍼져나가는 소리의 공명 덕분에 빠른 곡이나 복잡한 곡은 여러 음이 뒤섞여 예쁘지가 않다. 천천히 울림을 즐기며 공명이 퍼져나갈 때와 줄어들 때의 완급을 따라 호흡하며 진정한 신선놀음이 시작된다. 텅드럼, 마음을 울리는 악기, 정말 맞는구나.


“엄마, 이거 소리 예쁘다. 나도 한 번 해볼래.”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지러운 숫자들을 쓰윽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말렛을 들어 통통 두드린다. 박자도 음계도 없는 소리의 아련한 울림이 하나 둘 얹히고 사라지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엄마, 반짝반짝 작은 별. 이 노래는 어떻게 쳐?” “응. 1 1 5 5 6 6 5” 피아노나 계이름을 알 리가 없는 아이에게 이 숫자 표는 난수표와도 같을 텐데, 게다가 순서대로 늘어져 있지도 않은 숫자들을 금방 듣고 따라 한다. “엄마, 그다음은?” “4 4 3 3 2 2 1” 어라? 나보다 습득이 빠르다.


아이는 불과 몇 분 후, 반짝반짝 작은 별을 끝까지 연주했고, 이 노래는 ‘ABC 송’이랑도 똑같다며 신기해했다. 어설프게 계이름과 숫자와 위치를 연결하려던 나보다 직관적으로 숫자를 듣고 찾아내 두드리는 아이가 훨씬 빠르고 쉽게 악기를 다루게 되었다. 아이에게 일찍이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었으나 본인의 관심 없음 흥미 없음으로 좌절했던 지난날의 아픔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리는 합주가 가능한 파트너가 되었다. “봄아, 엄마가 피아노 반주해줄게. 같이 해보자!” “엄마, 그럼 이거 영상으로 찍어서 함미(외할머니)한테 보내드리자!” 아이와 나의 인생 첫 합주가 시작되었다.


혼자 두드려 내는 소리도 예쁘지만 함께 만들어내는 소리는 온전한 화음이자 음악이었다.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악기를 만져보고 내가 아는 노래를 연주해낸다는 기쁨이, 엄마랑 같이 무언가 멋진 일을 할 수 있다는 설렘이 아이의 연주에 묻어났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입을 앙다물고 엉뚱한 번호를 두드리지 않겠다는 강한 결의 또한 음 하나하나의 울림을 타고 전해졌다. 반음 올림과 내림이 없는 단순한 음계를 가진 이 악기에게 딱 어울리는 곡을 골라낸 아이의 탁월한 식견이 놀랍기도 했다. (물론 아이의 눈높이에서 당연한 선택이었겠지만.) 내가 연주하고픈 많은 곡들 도처에 숨겨져 있는 반음들 때문에 연주하다가 멈칫하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뭐지, 이 악기. 아이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 연주하라는 깊은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는 건가.  


널리 알려지지 않아 많은 정보도 없는, 하지만 실은 너무나 단순하고도 쉬워서 크게 고민하지 않을수록 더 잘 연주할 수 있는 악기 텅드럼. 무용한 것들 중에 가장 무용해 보이는 솥뚜껑 같은 외모에 숨겨진 영롱하고도 몽환적인 울림은 매력적이다 못해 중독적이다. 아이는 이제 집에 누군가 찾아오면 얼른 텅드럼을 들고 나와 “이건 텅드럼이라는 건데 아주 예쁜 소리가 나요. 한 번 해보세요.” 하며 권하고, 사람들은 투박한 외모에서 예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이가 연주를 시작하면 감탄하고, 자신도 한 번 해보겠다며 바닥에 앉아 말렛을 통통 두드리며 나도 이 거 하나 사야겠다며 탐을 낸다. 사실 대단한 음악을 연주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기만 한다면 이보다 쉽고 아름답고 편안한 악기도 드물다. 그저 천천히 다른 음과 섞이지 않을 정도로 하나씩 하나씩 두드리며 아름다운 소리의 울림과 공명과 소멸을 즐기면 될 뿐. 어느 순간 익숙해지면 간단한 멜로디 정도는 쉽게 연주할 수도 있고,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예쁜 화음도 만들어 낼 수 있다. 피아노와 함께 연주해도 묻히지 않고 소리를 얹을 수 있을 정도의 저력도 있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난 원체 이리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봄, 꽃, 달, 그리고 텅드럼.......”


엄마의 우아한 취미생활에 새로운 카테고리가 하나 생겼다. 봄이의 귀여운 취미생활에도.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지만 특별한 재능이 없어 '기술'을 연마해야만 하는 음악은 듣는 것에만 그쳤던 수많은 그대들에게 슬며시 텅드럼을 권한다. 말 그대로 크게 쓸모는 없겠지만 아름다움은 보장한다. 큰 욕심만 스스로 내지 않는다면 심신의 안정은 덤이다.


배운 지 몇 분 만에 합주가 가능했던 놀라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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