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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Oct 24. 2020

남편의 뒤를 밟았다

따로, 또 같이



매일 새벽, 잠들어 있는 나와 아이를 어둠 속에서 확인하고 남편이 스르르 밖으로 나간다. 하루 이틀에서 멈출 줄 알았는데, 남편의 새벽 기상과 외출은 그칠 줄을 몰랐다. 매일 새벽, 나는 남편이 부스럭거리며 깨어나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려는 걸 다 알면서도 모른 체 잠든 척해주었다. 사실 새벽마다 남편이 조용히 깨어나는 이유를, 길고양이처럼 살곰살곰 밖으로 나서서 향하는 목적지를 모르는 바도 아니다. 그저 이 모든 것은 남편이 오롯이 혼자 즐겨야 하는 순간이자 행위이고 일종의 의식이기에, 매일 새벽 나는 그와 함께 잠에서 깨지만 눈을 뜨거나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배려다.



한 시간 즈음이 흐르면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 쏴아아 물소리와 함께 샤워를 한다. 이제 내가 일어날 차례. 오늘의 새벽 외출도 좋았는지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를 털어내며 남편이 웃는다. “굿모닝, 보보!”



남자들의 출근 준비는 참으로 간소하고 간단해서 10분 남짓이면 모든 게 끝난다. 옷을 챙겨 입고 머리에 왁스를 사삭 바르고 현관 앞 콘솔에서 새 마스크 한 장을 찾아 쓰면 끝. 스마트워치의 버클을 끼우면서 오늘 입은 옷에 어울리는 신발을 빠른 눈으로 훑어 ‘탁’ 하고 내려놓으며 조금은 다급해진 목소리로 “다녀올게.”하고 나서는 남편의 발걸음이, 오늘도 바쁘다. 우리는 아침에 그렇게 딱 두 마디를 나누었다.



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 차를 기다리며 물끄러미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매일 새벽 오갔을 저 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밟힌다. 노란 버스에 아이를 올려 보내고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다가 다시 그 길과 눈이 마주쳤다. 쌀쌀한 기운이 무심한 척 바람에 실려와 하느작거리며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어느새 나는 그 길 위에 서 있었다. 휴. 그래, 어디 한 번 밟아보자. 남편의 뒤를.



비가 많이 온 여름을 지난 가을 문턱의 흙길은 살짝 폭신한 느낌이다. 군데군데 솟아있는 돌부리들은 쿠키에 콕콕 박힌 초코칩처럼 씹는, 아니 걷는 맛을 더해준달까. 바람결에 스치는 풀냄새에 느린 걸음이 잠시 멈춘다. 눈을 감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다. 아릿한 풀 비린내와 내 걸음을 따라 퍼져 나온 흙먼지의 구수함, 살짝 차가워진 가을 아침의 공기가 허파 깊숙한 곳까지 차 들어온다. 후우우 하고 다시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뜬다. 어릿하고 어지럽던 눈 앞이 점점 밝아진다. 선명해진다. 초록과 노랑과 빨강과 갈색과 파랑과 하양, 저 멀리 분홍과 보라까지, 알록달록 색감의 천국. 나는 숲 속에 서있었다.  




아무도 없는 아침의 숲에선 바스락바스락 작은 생명들의 분주함이 오롯이 느껴진다. 인기척을 느끼고 수풀 속으로 숨어드는 길고양이의 숨바꼭질, 포르르 포르르 나무 위를 재빨리 오르내리는 다람쥐와 청설모의 발걸음, 콕콕콕 딱딱딱딱딱 일정한 리듬으로 나무기둥을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입질과 종종종 뛰다가 파드득 날아오르는 까치의 날갯짓까지. 분주하지만 소란하지 않은 생명의 소리들이 신비로운 세계로 한 걸음씩 나를 이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깊이, 더 깊이.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내가 내쉬고 들이쉬는 숨에 풀잎이 하나 둘 몸을 세우고 누이는 소리만 들릴 즈음, 몸을 일으켜 저 멀리를 바라보면 강이 흐른다. 팔을 한 껏 펴고 가슴을 쭈욱 내밀고 온 몸의 관절 하나하나를 늘일 듯이 기지개를 켠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에 눈이 부시다. 매일 새벽, 저 멀리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며 어두웠던 숲의 그림자가 슬며시 걷히는 이 길을, 그 아찔하고도 설레는 순간을 오롯이 홀로 즐겼을 남편이, 어딘가 얄밉다.


숨은 청설모 찾기, 아침 산책길에 가장 반가운 친구


크게 우뚝 솟아있는 산이 아니라 집 앞에 다정하게 드리워진 오름직한 동산, 이리저리 발걸음을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도 길을 잃을 리 없는 아담한 숲에서, 매일 새벽 홀로 산책을 즐겼을 남편의 마음을 만난다. “나는 취미가 없어.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그냥 주어지는 게 있으면 묵묵하게, 결국엔 ‘잘’ 해내는 거지.” 두 팔을 가슴 앞에 모으고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만원 전철에 몸을 싣고 나서는 출근길, 새벽부터 저녁이 되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책상 앞에서 가만히 앉은 채 하루를 바쁘게, 성실하게, 그저 묵묵하게 지내고, 다시 또 숨 막히는 전철에 지친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올 그의 하루가 문득 너무도 애잔하다. 현관문을 여는 소리에 “아빠아아아!”하고 달려가 다리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는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며 오랜만에 만난 또래 친구처럼 웃고 장난치고 놀아주다 나란히 잠이 들기까지, 어쩌면 한 순간도 허락되지 않은 그의 ‘홀로 있을 수 있는’ 시간. 그는 우리가 모두 잠에서 깨지 않았을 그 새벽, 나름의 방식으로 그 시간을, 그 순간을 찾아내어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외로움이나 쓸쓸함이 아니라, 홀로 있는 순간의 고독함. 나는 고독의 힘을 믿는다. 내 안을 가득 채운 정서가 사실은 고독이라는 것을, 희미한 연기와도 같은 그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조금 더 단단해지고 너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남편과 아이가 잠든 사이에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하는 순간들이 내 안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엄마 없이는 한순간도 견딜 수 없는 아이의 옹알거림을, 매달림을, 웃으며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을 안다. 남편이 스스로 자신만의 그 순간을 찾아낸 것이 다행이다. 기쁘다. 그가 오롯이 홀로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을, 방법을 찾아낸 것이.



산은 매일 아침 다른 얼굴로 남편을 안아줄 것이다. 회사원으로도, 남편으로도, 아빠로도, 혹은 아들로도 아닌 그 자신, 온전한 존재로 스스로를 마주하게 할 것이다. 오직 자신의 두 발로 디디고 있는 흙길이, 하루하루 다른 빛깔로 그림자를 드리워주는 다정한 나무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몸에 안기듯 몰려오는 아침의 안개가, 고요한 숲의 밤을 몰아내듯 내쉬고 들이쉬는 자신의 숨소리가, 그의 마음을 온전히 비우고 또 충만하게 채워줄 것이다. 길을 잃을 리 없는 방황의 시간들을 즐기다가 다시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더해줄 것이다. ‘홀로 있음’의 즐거움과 알 수 없는 외로움을 조화롭게 즐기며, 근육이 단단하게 뭉쳤다 풀릴 때마다 찾아오는 저릿한 고통의 역설적인 쾌감을 만끽할 그의 새벽이, 어쩐지 처연하게 아름답다.



토요일 새벽, 아직 동이 트려면 한참은 멀었을 어두움 속에서 남편이 또 부스럭거리며 스르르 일어난다. 출근의 압박이 없는 주말 새벽이면 남편은 차를 몰고 좀 더 멀리, 좀 더 높고 너른 산을 찾아 떠난다. 주말 아침이면 아이가 깨지 않게 볼륨을 조그맣게 줄인 채로 커피를 홀짝이며 넷플릭스를 헤매던 우리 부부의 일상은 사라졌지만, 조그맣고 여린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 아침의 평화로움이, 베란다 창문을 한껏 열어젖히며 마주하는 새 아침 공기의 상쾌함이, 설렘 섞인 고독함을 일깨우며 나를 채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시간의 변화를, 계절의 변화를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있을 남편의 아침을 떠올리며 아련한 행복에 젖는다. ‘함께하는 주말 아침’을 깨뜨린 게 괜히 또 미안하게 느껴질 그의 여린 마음을 알기에, 나는 일찌감치 잠에서 깼으면서도 굳이 기척을 하지 않는다. 그가 살며시 침대에서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가늘게 뜬 실눈 사이로 바라보며 빙긋이 웃다가 두 시간쯤 지나서야 잠에서 깬 듯 메시지를 보낸다. “보보, 오늘도 산에 갔나 보네. 오늘은 어디야?”



잠에서 깬 아이가 방문을 열고 나온다. 아빠는 또 나를 안 데리고 혼자 산에 갔다며 샐쭉해지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간지럼을 태운다. 까르르 깔깔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고독하고 적막하던 집안을 가득 채운다. 이제 얼마 후면 땀의 자국이 채 지지 않은 남편이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집에 돌아올 것이다. 오늘 본 산의 풍경이 어떠했는지, 단풍이 얼마나 울긋불긋 물들었는지, 아무도 없는 산에 자신이 얼마나 빨리 오르내렸는지, 정상에 오르기 위해 매달렸던 바위가 얼마나 가팔랐는지, 자신이 산에서 내려올 무렵에야 등산객들을 실은 차들이 산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며 의기양양하게 이런저런 무용담을 늘어놓을 남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홀로 마주하는 시간을 오롯이 지나온 사람들의 만남은 유난히 더 반갑고 진하다. 우리 삼총사는 그래서 오늘도 끈끈하게, 재미나게,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행복하게 오늘 오후를, 매일매일을 살아갈 것이다. 따로, 또 같이.



오늘 아침 남편의 생존 신고
그리고 나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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