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의, 어쩌면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
갑자기 훅 쌀쌀해진 가을, 이른 아침 잠 부스러기가 채 떨어지지 않은 눈을 부비며 습관적으로 집어 든 스마트폰에 뜬 빨간색 동그라미와 숫자 21. 이게 뭔가 놀라서 눌러보니 아침부터 친구들 단톡방이 소란스럽다.
친구의 아내가 죽었다...
친구의 아내는 우리의 후배이기도 해서 처음 소식을 전한 친구도, 그에 답하는 우리 모두도, 한 마디 한 마디가 짧고도 조심스러웠다. 도도한 세련미를 풍기며 선배들에게도 눈웃음 한 번 짓지 않던 똑똑한 그녀가 사실은 암투병 중이었고, 그렇게 이 가을을 넘기지 못하고 길고도 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 그녀를 몇 번 보지 못했지만 늘 건너 건너 소식은 듣고 있었고, 그들의 아이가 커 가는 이야기 또한 드문드문 들었던 터라 마음이 무너졌다. 죽음 앞에서 떠난 자보다 남겨진 자들에게 지워지는 물에 젖은 솜 같은 묵신한 삶의 무게가 얼마나 다리를 휘청이게 하는지 알기에, 어쭙지 않은 위로의 말 한마디 전송하지 못하고 가만히 대화창을 바라보았다.
행복한 일상의 색감이 짙어질수록, 역설적이게도 난 이 행복이 언젠가 한 순간에 와장창 깨지는 건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함께 자라는 걸 느낀다. 습관처럼 농담처럼 남편에게 전하는 “죽지 마. 죽으면 안 돼!”라는 말도, 사실은 너무도 뼈저린 부탁이자 기도 같은 말이었고. 문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곱디 고운 나의 딸아이를 보면서도, 아기 때부터 ‘내가 혹시 이 아이를 실수로라도 떨어뜨린다면’ 혹은 ‘내가 아이를 태우고 운전하다 사고가 나서 이 아이를 다치게 한다면’ 따위의 불길한 상상에 헉하고 숨이 막힌 적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의 일상 속 저 깊은 어딘가에 늘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 불안감은, 아무리 밟아도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끈질김으로 가끔씩 콱하고 나타나 내 목 뒤를, 옆구리를, 발꿈치를 물어 생채기를 낸다.
상상만으로도 숨통이 조여 오고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일진대, 아내의 생명이 조금씩 조금씩 사그라드는 그 순간들을 곁에서 지켜왔을 친구의 마음을, 그 고통과 두려움을, 처절하고도 비통한 그 마음을, 나는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늘 밝고 실없는 농담을 즐겨하던 그 친구의 얼굴에, 하얗게 스러져 가는 아내를 안고 눈물을 떨구고 있을 모습이 도저히 덧입혀지지 않는다. 내 아이 또래의 딸아이가 며칠 간을 조문객들의 통곡 속에서, 아니 어쩌면 앞으로 평생을 축축하게 젖은 시린 아픔을 안은 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리고 아프다. 문득 찬 바람이 쉬익 하고 불어오는 이 계절마다 젖은 마음 한구석이 날카롭게 얼어붙어 가슴을 찌를 테지.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음에 굳은살이 배기고 딱딱해져 슬픔이 그리움으로 변해가더라도, 오늘의 이 하늘과 이 공기, 이 냄새, 이 느낌들은 문득문득 오롯이 살아나 그들의 발목을 붙잡겠지.
열아홉 살 때, 무슨 통속극의 한 장면처럼 건강하던 아빠가 심장마비로 한 순간에 우리 곁을 떠나신 이후, 누군가의 부고를 들으면 한 순간에 마음이 얼어붙는다. 고인이 나와 어떤 관계였든, 나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늘 남은 자들의 자리. ‘나도 다 알아...’ 따위의 눈빛이, “힘내!”라는 공허한 한 마디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어떠한 말 한마디도 쉽게 뱉을 수가 없다. 그저 함께 울어주고 손잡아줄 뿐. 정작 내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별로 가깝지 않은 누군가의 부고 앞에서도 주책없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마음속 저 깊은 우물에 고여 있던, 내가 그간 모른 체 살아온 눈물이 아직도 채 마르지 않아서 인가보다.
잡혀 있던 오전 일정들을 급하게 취소하고 머리를 매만진다. 사는 곳이 멀다는 이유로, 아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친구들과의 모임에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고 지내온 지 10년. 코로나 때문에 조문도 많이들 생략하는 분위기지만 가지 않을 수 없다. 한강변을 따라 두 시간 가까이 운전을 하며 찰랑찰랑 차오르는 눈물에 목이 잠긴다.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한낮의 빈소는 너무도 텅 비어서 친구는 저 멀리서도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 다가왔다. 수년이 흐르고 검은 마스크로 얼굴 절반을 가렸지만, 슬픔은 같은 결을 알아보는 법. 한 팔을 크게 벌리며 다가오는 친구를 꼭 안아주었다. ‘이렇게라도 얼굴을 본다.’며 웃어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아빠의 빈소에서 늠름한 척 웃고 있던 내가 보였다. 담담하게 빈소 앞에 서서 손을 모으고 있던 그의 옆에, 나의 기억보다 훨씬 더 힘이 빠지고 여릿해진 친구 아내의 사진이 있었다. 너무도 젊고 곱고 예쁜 그녀가 아직 마흔이 채 되지 않은 남편과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을 두고 떠났다는 사실이 기가 막혀 한숨을 뱉다가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토악질처럼 터져 나왔다. 연기가 피어나지 않는 향로에 가느다란 향을 하나 가져다 꽂는다. 떨리는 손끝 때문에 좀처럼 불이 붙지 않는다. 마주 선 친구와 고개를 숙인다. 처음으로 우리가 모였던 자리에서 혼자 급히 마신 술로 시원하게 토를 쏟던 20대의 모습이, 예뻐하던 후배와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며 싱글벙글하던 서른 즈음의 모습이, 늘 실없는 농담으로 우리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다정하게 모두를 챙기던 평소의 모습들이 어지러이 비쳐 보였다.
“와... 나의 30대는 진짜 왜 이러지?”
기가 찬 듯 웃으며 말하는 친구에게 “참... 파란만장하다.” 정도의 뻔한 말밖에는 건넬 수가 없었다. 지난해 말 아내의 몸에 자라고 있는 암세포를 처음 발견하고 진행과 전이가 너무 빨라 어느 정도는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에 가슴이 컥 막혀왔다. 몇 달 전 자신이 친구들 단톡방에 ‘내가 조만간 당신들 전부를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어.’라는 말을 남겼던 게 사실은 이 얘기였다며 웃고 있는 친구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공허하고 쓸쓸했다. 아무도 몰랐다. 늘 먼저 만나자 조르고 혼자 약속 잡고 바람맞고 그러던 캐릭터의 친구가 올 한 해 이 컴컴한 터널 속을 걷고 있었단 사실을. 늘 챙기는 건 그쪽이었고, 보는 둥 마는 둥 대답도 안 하고 살았던 우리가, 내가, 참 못되어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때는 정말 함께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을 만큼 끈끈한 사이였지만, 이제는 차마 ‘나가기’를 누르지는 못하고 알림을 꺼 놓은 단톡방, 겨우 그 정도의 껍데기만 남은 관계였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아빠랑 딸이 남아 있는 풍경은 서글프고, 엄마랑 딸이 남아 있는 풍경은 측은하다. 이제 여덟 살 된 딸아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그녀는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하루에도 오백 번은 ‘엄마’를 부르는 일곱 살 내 딸을 보며, 얼굴도 채 모르는 그 아이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을 슬픈 기억의 잔상들을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빈자리를 하나 마음에 품은 채 살아가야 할 그 아이의 삶이, 내 친구의 삶이, 그들을 바라보며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을 그의 아내가, 시리고 아프다.
처음 부고를 들은 순간부터 하루가 오롯이 슬픔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잊고 또 내 앞에 있는 행복들을 즐기며 살아가겠지. 그동안 그래 왔듯 단톡방은 눈으로만 읽어가며 가끔씩 귀여운 이모티콘이나 하나씩 보내고 말겠지. 한 번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온종일 마음이 무너져 있었지만, 또 내 아이를 꼭 끌어안고 그 보드라운 볼에 얼굴을 부비고 숨소리를 들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도하겠지. 평소에도 안 하던 전화를 굳이 걸어 안부를 묻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시린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면 어디에서든 그들을 떠올리겠지. 담담하게 잘 살아갈 거라 믿는다. 서글프거나 측은하지 않게. 누구나 아픈 구석 하나씩은 안고 사니까, 어떻게든 살아는 지니까. 그들의 기억 속에 아내가, 엄마가, 아픈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있기를, 저 하늘 별이 되어 매일 밤 그들의 마음속에 반짝이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