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낭만적 허영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잔뜩 흐린 오후, 엷은 흰색 커튼 사이로 걸러진 햇살은 거실 끝 쪽만 간신히 밝힐 정도로 힘이 없다. 선선하게 돌아가는 에어컨과 선풍기, 식탁 위로만 쏟아지는 둥근 주황빛 불빛, 화려한 빛깔과 무늬의 리넨 드레스를 입고 어두컴컴한 탁자 한편에 기대 달큰한 칵테일을 한 잔 해야 어울릴 것만 같은 재즈 트리오의 음악이 이어지는,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파도 소리도 들려올 것만 같은 이곳, 우리 집 거실이다.
나도 모르게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떠 본다. 등 뒤에선 재택근무 중인 남편의 손가락이 노트북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내는 타닥타닥 소리가, 저 멀리 아이 방에선 쏴르르 쏴르르 레고 블록을 헤치는 소리가 먼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들려온다. 가만히 리클라이너 의자를 뒤로 젖히며 좋아하는 작가가 최근에 발표한 보라색 수필집을 집어 든다. 모두가 함께 있지만 또 각자의 삶을 충만히, 그리고 충실히 채워가는 지금 이 순간. 아, 행복하다.
한 때 잠시 지나는 유행이겠거니 했던 감염병 사태는 2년 차에 접어들었고, 그래도 한동안은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씩 가려야만 하는 걸 빼면 그럭저럭 일상의 평온함을 되찾아 가는 듯했는데, 또다시 시작이다. 학교가 문을 닫아 아이는 원격 수업을 시작했고 남편 또한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이 무렵이면 집 근처 학교에서 교복 입은 학생들이 웅성웅성 재잘재잘 쏟아져 나오곤 했는데, 텅 비어버린 버스 정류장엔 뜨겁고 습한 공기만 가득하다. 간간이 집에서 커피 한 잔을 나누던 이웃들과도 오가기 어색하고 조심스러워진 요즘,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또다시 고립이 시작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로 다시 들어가는 길목처럼, 열기만 머금은 채 비를 쏟아붓지도 못하는 두터운 회색 구름처럼, 한숨으로 가득한 일상이 예고되었다.
문을 걸어 잠근 채 아이도 남편도 나가지 않는, 세 식구가 하루를 온종일 함께 하는 날들이 이어진다. 하루에도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지만, 이곳은 마치 외부 세계와는 온전히 독립되어 있는 하나의 우주와도 같이 고요하고 안전하며 평온하다. 몇 시간 동안은 그 누구의 목소리도 한 번 들리지 않을 만큼 각자가 하고픈, 혹은 해야 할 일들을 가만히 해내다가도, 잠시 쉬고 싶어 기지개를 켜는 아빠의 숨소리에 저 멀리서 아이가 화들짝 기뻐하며 달려 나와 안길 때면 집안은 금세 꺄르르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 어느새 아기 티를 벗어버린 아이는 엄마 아빠 품 속에선 여전히 아기 같아서 아빠 등에 올라타 말타기 놀이를 하기도 하고, 가만히 다가와 엄마 품에 스르르 녹아들듯 안겨서 아기처럼 자장노래를 불러달라 어리광을 피우기도 한다. 평상시였다면 아마도 늦은 밤에나 잠시 누렸을 이 일상의 행복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것과 거리가 먼 사태 덕분에 하루의 모든 순간으로 확장되었다. 어쩌면 나는,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으로 가득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고 고립된 이 곳은 사실은 우리만이 누리고 간직할 수 있는 완벽하고 온전한 시간과 공간이기에.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곳이 우리가 그토록 닿고 싶었던 꿈이자 이상이자 세계였기에.
남편은 종종 아이가 아직 어리고 예쁜 이 시기에 한 해 정도 안식년을 가지고 오롯이 함께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회사에 몸이 매인 직장인이 막연한 꿈처럼 생각만 할 수 있던 일이 현실로 쿵 떨어져 버린 지금, 비록 우리가 꿈꾸던 대로 파리 센 강변을 거닐지도, 자다르의 해변에서 노을을 즐기지도 못하지만, 이렇게 온종일 한 공간에서 서로의 모든 일상을 함께 할 수 있는 날들이 주어졌다는 건, 어느샌가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일상이라는 게 회복된 그 순간에 다시금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될 순간들이 아닐까 하는 낭만적인 허영을 부려본다. 아마도 나는 이 시기의 나를, 우리를 무척이나 그리워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저만치 흘러가버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아쉬워 조금은 울컥할지도. 서로를 온전하게 사랑하고 아끼며, 우리 셋만 있다면 이 단절되고 고립된 시기도 아름답고 행복하다 감사하며 충만한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로 이 순간들을 말이다. 흘러가는 순간들이야 붙잡을 길이 없으니 배경처럼 음악만 흐르고 있는 이 공기를 가르고 나가 두 사람을 꽉 끌어안아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