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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군 Jan 24. 2019

했다고 치자

사소한 것이라도

작년 중순쯤이었다. 연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3D 모델링 외주 작업도 하고, 이것저것 부지런히 한 것 같은데,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도 딱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작업은 더디 진행되었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불안할 정도로 하려고 했던 것들, 해야 할 것만 같은 것들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해야 할 일 사이에 파묻히니 하루하루 부지런히 살아도 도무지 만족할 수 없었다.


기분 탓인가? 쌓아도 쌓아도 끝이 없네@_@  - https://pixabay.com/


하루는 가만히 앉아서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없나 곰곰이 생각해봤다. 분명 한편으로는 한 것이 없는 것도 같았다. 매일 놀지 않고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했지만, 딱히 결과물이 만들어진 일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배우고, 고민하고, 시도했지만, 그것이 어떤 완성된 제품이 되거나, 구체적인 기획이 되는 등 한두 줄로 종합할 수 있는 결과물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분명 작은 성과가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에는 하지 못했던 가공을 할 수 있게 되거나, 새로운 제품을 디자인하거나, 몇몇 제품은 시험 가공 정도는 하였거나, 등등. 잘게 나눠보면 긴 과정에서 작은 걸음들을 딛고 있었고, 그에 따른 성취나 배움이 분명 있었다. 다만 그것이 머릿속의 구상에 비해 사소해서 '내가 이런 걸 했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을 뿐.

또 한편으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는 생각도 했다. 줄이고 줄여도 크게 봤을 때 3~4가지 일을 한 번에 하고 싶었고, 마인드맵을 그려보면 가지가 수십 개는 되었다. 그러니 개중에 한두 개를 해서는 못한 나머지 수십 가지만 머릿속에 맴돌 수밖에. 게다가 한두 개라는 것이 어떤 큰 일의 일부인 경우엔 그마저도 딱히 무엇을 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하고 싶고...  - https://pixabay.com/


그럼 내가 하나의 일에 집중해서 완전하게 결과물을 내는 방식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일을 작은 단위로 나눠 계획을 세운 뒤 그것을 하나하나 다 밟아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나는 한 가지일에 집중할 수 있을까, 혹은 처음 하는 일을 그렇게 잘게 잘 계획할 수는 있는 걸까? 따위의 질문을 떠올렸다. 질문과 동시에 떠오르는 답은 '아니오'. 늘 계획은 어긋났고,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튀어나오고, 그러다 다른 재밌어 보이는 일이 마음을 흔들기도 하고.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일을 '집중적'으로 '잘 계획해서' '결과물을 만든'다는 것은 나에겐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매일 부지런히 살면서 '나는 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을까?' 따위의 생각을 품고 사는 것도 퍽 피곤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은 '했다고 치자'. 마음속에 나를 불러대는 수십 가지 재밌어 보이는 일을 손에 잡히는 대로, 가끔은 계획을 세워가며, 그렇게 하나하나 했을 때, 100가지 중에 하나라도 했을 때, 그럴 땐 그냥 나는 무엇이든 한 사람인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사소한지, 얼마나 명확한 결과물이 나왔는지 아님 그저 과정의 일부였는지 따위는 생각지 않고, 그냥 내 맘대로 퉁쳐서 '오늘도 하나 했으니, 부지런히 뭔가 했다 치자'라고 생각하기로 해버렸다.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해야 할 일, 하고 싶어서 펼쳐놓기만 한 일에 짓눌릴 때면 가만히 앉아서 안 한 일은 멀리 밀어놓고, 그간 했던 일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가며 돌아보았다. 사소한 일이라고 이름을 대충 붙이지 않고, 좀 굵직한 일이라고 우대하지 않으면서 똑같이 하나하나. 그렇게 퍼질러 앉아서 나의 발자국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나도 퍽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원래 뭐 한 방에 되고 그런 거 없어. 그런 거 다 뻥이야~"  -  https://pixabay.com/


별생각 없이 인터넷에서 대단한 사람 이야기를 듣고, 혹은 주위에서 무엇인가 이루어가는 사람 소식을 건네 들으면 나도 어서 한 방에 큰 포인트를 따야 할 것만 같다. 이번에 하는 일에선 대단한 결과물을 만들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야 그간 쏟아부은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면 그들이 했던 것도, 그리고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것도 작은 포인트를 부지런히 모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은 성취가 쌓이고 쌓여 겨우 형태를 잡아가는 게임. 그리고 그 작은 성취를 위해서는 수십 번의 헛발질을 피할 수 없는 게임. 우리가 하는 게임이 그런 게임이라면, 수십 번의 헛발질도 의미 있었더라 라고 봐줘야 하지 않을까. 좀 더 후하게 봐서 그런 헛발질에도 똑같이 1점을 줘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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