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십 대를 짓눌렀던 건 ‘이해할 수 있음’에 대한 믿음이었다.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 수많은 학문 이름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연구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욕망이 학습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러니 사실 나의 짓눌린 이십 대가 어느 정도는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아직도 ‘이해할 수 있음’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내려놓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인지, 그저 나의 노력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부족해서였는지 과연 누가 그것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지금에 와서 내가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는 것은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결국 이해하지 못한 존재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동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달려들었던 그 시간이 번번이 좌절로 이어지면서 생긴 이십 대의 유산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이야기는 누군가는 이해할 수 있었음에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는 못난 자기반성 혹은 변명일 수도 있다. 다만 이제 와서 새삼 ‘이해할 수 있음’에 대한 믿음을 운운하며 그 날들을 들춰내는 것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지 않은’ 것이 존재하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나 자신에 보내는 위로이자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했던 그 시간을 정리하기 위함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누군가에게 당신도 그렇지 않으냐 동의를 구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시간을 복기하며 다시 한 번 그녀 혹은 그 순간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길 은밀히 바라고 있는지도.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선 그녀를 떠올려야 한다. 그녀. 앞에서 이미 이야기하였거나 듣는 이나 말하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 하지만 난 아직 그 누구도 언급한 적이 없으니 여기의 ‘그녀’는 말하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여자가 되겠다. 내가 떠올리는 여자. 그런 여자가 한 명이라면 그것도 왠지 외로운 삶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감히 누굴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고 호기를 부려보고 싶지만 지금 내가 특정할 수 있는 사람은 꼭 그녀이다. the 그녀.
그녀는 꽤 오랫동안 나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할 수 없었다. 앞 문장을 다시 풀어보면 어느 특정한 시점을 계기로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그건 아마 어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도 그 정도의 관심을 받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이상할 일도 아니다. 이 흰 바탕에 검게 쓰인 문자를 읽는 사람에게는 나도 어느 정도는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난 건 복학생 신분으로 3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부지런히 캠퍼스를 돌아다니던 어느 해 3월 중순 무렵이었다. 옛날에는 10년은 지나야 강산이 변했지만, 이제는 3년만 지나도 캠퍼스는 구석구석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큰 건물이 몇 채 들어 서기도 했고, 기존의 상점들도 위치를 바꾸거나 새로운 매장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사람이라도 남아 있으면 새롭게 시간을 쌓아 볼 텐데 하필 마지막 학년을 남기고 휴학하느라 (게다가 남들보다 일 년을 더 놀았다) 동기라곤 남아 있는 녀석들이 별로 없었고, 까마득한 후배들만 스치듯 지나치곤 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소수였고, 설령 내가 먼저 알아본다 한들 그들에게 선뜻 다가갈 용기도 내기 어려웠다. 학식에선 대형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관심도 없는 뉴스 채널에 시선을 집중하고 밥을 먹었고,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도서관 혹은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가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도 대체로 후줄근한 츄리닝 복장에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사내자식들이 풍경 대부분을 차지했다. 볼 것 없는 캠퍼스에 하루에 한 번 인사를 나눌까 말까 한 사람들 사이를 스쳐 다니던 즈음의 일.
“야! 김민재!”
그 무렵 나는 어색한 만남을 피하고자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발 앞 2미터 정도에 내리꽂고 걷는 게 습관이었는데, 오른쪽 어디선가 그런 나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그 목소리가 날아들었을 때 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가능하면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수업시간마다 맨 앞에 불리는 이름은 내가 고학번이라는 사실을 매번 상기시켰다. 그래서일까 사내 목소리라면 모를까 카랑카랑하고 높은 소리를 내는 하지만 나의 이름을 존칭 없이 부를 수 있는 여자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소리가 날아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나는 한 번 더 미간을 찌푸렸다.
“어? 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