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10년차다. 약 먹고 지낸지는 3년이 좀 못 되었다. 첫 6개월은 안개 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어제가 오늘같았고, 내일이 오늘같을 것 같았다. 머릿속이 희뿌옇기만 해서 뭐가 문제인지 인지도 못 하고 살았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약은 있었다. 행복하지도 않았지만 불행하지도 않았다. 다만 산송장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새로운 병원을 찾았다. 30초만 보는 의사도 별로였다. 병원과 약을 바꾸고 비로소 인간의 범주 안에 들어왔다. 지금 병원에서는 약을 과하게 권하지 않으며 약물에 민감한 나를 배려해준다. 내 얘기도 잘 들어준다.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으면 딱 잘라서 아니라고 단호히 얘기한다. 좋다.
10여년 간 우울을 앓으며,겪으며 느낀 게 왠지 적고 싶어 적는다.
어마어마하게 게을러진다. 사람이 살기 위해, 자신을 유지해야 하기 위한 일들이 모두 일로 느껴진다. 양치, 머리감기, 세수, 샤워. 몸을 단장하는 일부터 식사, 화장실 가는일까지 모두 해야할 일로 느껴진다. 식욕이 떨어져 지금은 47kg이 되었다. 게으름과 무기력 어딘가에서 나는 매일 둥둥 떠다닌다. 헤엄칠 여력이 없기에.
지난 일에 계속 집착한다. 우울에 따라 다르겠으나, 나는 지난 일, 그리고 지금 내가 할 수 없는 복수 따위의 일에 집착한다. '그 때 그랬더라면', '지금이라도' 따위로 시작하는 문장은 실행력이 없다. 그렇게 지낸다.
기억력이 감퇴한다.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운 삶을 산 지 반 년이 되었다. 우울 탓만은 아니겠지만 쓰레기 버릴 때, 강아지 산책을 갈 때 정도를 제외하면 그 이상 먼 곳을 잘 가지 않는다. 시내버스비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없어진다. 예술의 전당 공연에 올라본 나이지만 내 실력으로 올라간 게 아니라 순전 운이었다. 노력은 했으되 노력했다고 잘 했다는 건 아니다. 며칠 후면 제주에 춤을 추는 알바를 하러 간다. 가볍게 생각한 것과 달리 내가 상상도 못한 동작들을 해내는 영상들을 보게 되었다. 어, 이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망했다. 라는 생각만이 가득찼다.
오늘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술을 마셨다. 급히 마신 술 때문에 구토감이 몰려왔고, 택시를 탔다. 다행히 밖에다 뱉는 데 성공했다. 기사가 봉투를 줘서 망정이지. 택시에 토하면 돈을 내야한다는 생각만이 가득찼다. 다행히 살아서 집에 돌아왔다. 술도 마셔본 놈이나 잘 마시지 싶었다.
사소한 것들이 일로 느껴진다.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는 것, 방의 창문을 닫는 것. 아침에 약과 영양제를 챙겨 먹는 것. 이런 게 생활에 생각나면 하는 행동이 아닌 해야할 '일'로 느껴진다. 일다운 일은 하지도 못하고.
나에게 친절하고 신경을 써주는 지인 덕에 요새 화는 많이 줄었다. 자주 연락하기는 마음에 걸려 어렵지만 덕택에 무너지지 않고 살아있다. 속에 들끓는 화가 줄어든다면 뭐라도 나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건강히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