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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연산 Mar 28. 2020

나는 내가 바라던 사람이 되었지만

과연 이게 내가 정말로 바라던 상태일까 

나는 이십 대 초반에 그렇게나 되고 싶던 사람이 되었다. 꿈을 이뤄서 행복하느냐고? 


전혀. 내가 이십 대 초반에 되길 바랐던 사람은 감정이 없어진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참 하찮았다. 사람을 쉽게 좋아했지만 좋아한 만큼 쉽게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오히려 주위에 이런 사람 없을 정도로 과하게 사람에게 몰입하고, 기대하고, 실망했다. 한 사람 좋아하고 반년, 또 누구 한 1년 반 좋아하고 한 2년 우울에 찌들어 살면서 바랐던 것은 '이 지긋지긋한 애정결핍인지 뭔지 기름종이보다 얇은 마음 같은 건 좀 그만 신경 쓰고 싶다', '누굴 좋아하네 마네 하는 걸로 냉탕과 사우나를 드나드는 마음을 가지지 않기를',였다. 그렇게 이뤄진 사람 하나 없이 이십 대 중반까지 미욱하게 떠나보내고 이제는 서른이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이젠 그렇게 되었나 보다.

감정이 무뎌진 것이다. 감정이 없어지는 상태까진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름의 성과는 있었던 셈이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이런 거였나?  뭔 이런 중이병스러운 말을 진지하게 하고 있나 싶지만 이십 대 초중반엔 그렇게 썩어 들어가는 내 마음도 시간도 아깝기 그지없었다. 도피성으로 선택했던 많은 행동들도 썩 성에 차지 않았으니 이제야 마음에 크게 바람 불 일 없다는 게 얼마나 안도가 되겠는가.


그래서 슬플지언정 우울하지는 않은 것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 무슨 말을 들어도 그런가 보다 하고 덤덤하다.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여 내가 어떤 일에 반응하는지 알고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피해 산다. 습관적으로  항상 최악을 상상하다 보니 어떤 일에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슬플지언정, 울 일은 사라졌다. 


울 일 없는 성격이 되면 단점이 뭐가 있을까. 웃을 일도 없다는 것이다. 감정의 둔화는 하나의 상태이자 원인이기도 하다. 그 원인에 따른 결과는 이렇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어려워하게 되었다. 뭔가를'느끼는' 게 영 시원찮게 되었다. 무슨 감정도 약간 벽을 힘겹게 투과해 들어온 흐린 빛마냥 느껴져, 이게 있기는 한 건가 싶다. 


또 사람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다. 그동안 나는 즐거움, 활기, 행복 뭐 이런 것들을 다 가져다 버려야 했다. 우울이 너무 깊고 커서 밝은 것들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 뭐 그래도 기쁠 일이 없으면 슬플 일도 없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요리로 치면 재료들을 싸그리 쓰레기통에 모아 버렸으니 할 말은 없다. 감정이 무뎌지면,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든다. 애매하게 호기심은 가는데, 사람을 만나면 나를 유지하기 바빠 상대를 신경쓰기가 어려워진다. 그렇게 타인에 대한 관심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된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대화가 미묘하게 겉돈다는 것이다. 나이가 있으니 그동안 모아둔 데이터를 토대로 이런 상황에선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이런 말을/이런 질문을/이런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전혀 궁금하지가 않은 상태에서 물어보는 질문은 티가 난다. 눈동자에 초점 하나 없이 '와 그런 거 하시는구나, 그럼 이런 분야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셨어요?'라고 물어보고 있다, 내가. 내용이야 100점짜리, 흠잡을 데 없다. 그런데 어조도 억양도 없다. 억지로 끌어올린 솔 톤으로 말해봐야나도 알고 상대도 뭔가 이상한 기시감을 느낀다. 몇 년 전 한 번은 '혜성오빠랑 말하고 나면 잘못된 거 하나도 없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해, 말을 한 시간이 그냥 사라진 것 같아' 뭐 이런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미 그렇게 변해가고 있던 모양이다. 



사실은 사람이 좋은 거면서


우울로 인해 꽤 오랜 기간 심리상담을 다니며(정말 다행히도 교내에 학생은 무료인 심리상담시설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상담시설의 가격은 내겐 너무 비싸다) 이런 얘기들을 했을 때, 나를 오래 본 상담사는 종종 이렇게 대꾸했다. '아니, 사람들하고 잘 지내고 싶은 게 진짜로 원하는 거고, 그걸 해낼 자신이 없고 그러는 과정에서 치이고 다치고 상처 입을 게 무서워서 그냥 다 안 하겠다고 하는 거죠. 본인도 그걸 알잖아요' 


그러게. 그렇게나 오랫동안 '사람들하고 잘 지내고 싶다', '나도 술자리 가보고 싶다' '회식 가보고 싶다' '나도 누가 불러줄 만큼 인기 있고 멋지고 잘생겼으면 좋겠다' 따위의.. 좀 말하기도 민망했던, 차마 쓰지도 못할 만큼 어설픈 욕망들이 있었지만, 난 그게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알았는지 믿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사람은 철저히 이익이 있어야 움직이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이익이라고 하는 게 돈이나 뭐 경제적으로 실리 따지고 그런 게 아니다. 뭐 밥 잘 사주는 거, 차 있는 친구, 뭐 이런 간단하고 1차원적인 거 말고.  '같이 있을 때 재밌는 사람', '내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 '함께하는 시간이 기다려지는 사람' , 뭐 등등. 이런 것들도 모두 마음의 이익인 셈이다. 


그런데 나는 타인에게 뭔가 그런 이익을 줄 여유가 없는 인간이었다. 혼자 우울을 끼고 살기도 벅찬데 주위 상황도 좀 거지 같을 때도 많았고,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 탓에 으르렁거리라도 하는 날에는 까탈스러움을 받아줄 사람을 찾기보다는 혼자 삭히기를 반복하다 보니 주위에 친구가 없어진 탓도 있고. 굳이 이익을 볼 수 없는 사람을 만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결국 돌고 돌아 무자극 무반응, 이렇게 됐다. 이제는 감정이 북받칠까 무서워서 감동적이라는 영화도 안 보고, 행여라도 영화를 보면 영화를 즐기기보다 평가만 하고 있다. 감정을 느끼고 무너질 내가 무서워서 괜히. 영화 구조가 어떻네 각본이 어떻네 이런 소리. 요샌 다리가 부러지고 바이러스로 집 밖에 안 나가다 보니 하다못해 드라마를 몇 편 챙겨봤는데, 보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동한다 싶으면 괜한 기대 가지지 말아라 또 정신 못 차리네를 속으로 되뇌며 꺼 버렸다. 그래서 3주가 넘도록 채 네 편을 못 봤다. 


그뿐인가. 사람한테 말 거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 말을 걸기 전에도 나를 점검한다. 이게 다른 뜻이 있어서 괜히 연락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 반가운 건가. 그것도 아니면 '나 여기 아직 살아있는데 나도 좀 봐주세요' 인가. 사실 답은 안다. 


사람이 모순적이면 머리가 자주 아프다. 음악 플레이어 켜놓고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왜 동영상 재생이 안 되냐고 하면 컴퓨터가 고장이 안 날 리가 없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맹하고 지끈거린 지 꽤 오래되었다. 모르겠다, 이건 얼마나 되었는지.


나는 내가 바라는 걸 이루면 행복해지진 않아도 덜 불행할 줄 알았다. 이쯤 되면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마음도 잘 싸매고 살 수 있을 줄 알았고, 우울해 죽을지언정 그게 새어나오는 표정을 가지지 않을 줄 알았다. 걱정도 덜할줄 알았다. 


신기하게도 나는 덜 불행하다고 느끼지만 아직도 우울하고, 표정은 무표정으로 굳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아직 일말의 기대가 바닥에 잔부스러기처럼 남아 '이렇게 우울하고 보잘것없는 나를 누가 사랑하고 좋아해주지' 라는 불안과 걱정을 자아낸다. 누구든 내 진짜 모습을 알면 도망칠거야, 나도 그랬잖아..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누가 날 좋아해주면 좋겠다. 숨기지 못하고 걸음마다 뚝뚝 묻어나는 우울과 불안의 흔적을 보면서도 희망의 끈을 차마 놓지 못하는 내 모습도 발견한다.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되고 싶지만 이제는 동정조차 받기 어렵다.


이제는 잘 모르겠다. 


나는 내가 바라던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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