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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연산 Sep 23. 2019

그러니까, 우울해졌다

슬픔이여, 이젠 안녕

몸이 무겁다.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날도 꽤 있다. 남에게 연락을 하게 되면 괜히 청승을 떨게 된다. 주접은 옵션이고. 혼자가 힘들고 버거워 누군가를 애원하듯 만나면 또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힘들다. 날 만난 그들에게 미안함과 만남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또 무언가로 또 하나의 하루가 가라앉는다.


그러니까, 우울해졌다.


우울해서 그렇게 되었고, 그렇게 되어서 우울하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힘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먹는 양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입맛이 없는 것.  엄청나게 예민해졌지만 거기에 대응할 에너지도 없어진 그런 사실. 심지어 여기 옮기기에 손을 움직이기도 너무 무기력해지는, 그런. 너무 자잘해서 말하기도 무엇하지만 은근 턱턱 걸려 하루를 잘 삼키지 못하게 하는. 그런 생선 잔가시 같은 우울이.


앉아있는 것만 해도 버거워, 점점 뭔가 무너지고 있는 기분이 들어 불을 끄고 암실 같은 방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SNS를 보면 내가 너무 하잘것없어 비활성화를 했다. 카톡을 탈퇴했다가 다시 가입해 나를 추가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세어보고,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백 번 핸드폰을 본다. 그 누구도 연락은 오지 않는다. 통장 잔고로는 갈 수 없는 곳의 항공권 특가 세일 알람이 온다. 기억력이 많이 나빠지고,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진다.


일 년에 한 번쯤, 몇 달은 꼭 이렇다. 정도가 꽤 심한 편이었는데 그래도 매 년 조금씩 덜 깊어졌다는 생각은 든다. 아예 해결방법도 모르고 마냥 축축한 기분으로 살아만 있었던 때도 있었다. 몇 날 며칠 씻지도 않기도 했다. 좋아하던 모든 게 싫어지는 기분도, 볕 안 드는 물에 점점 가라앉는 듯한 먹먹함도 심했다. 우울이라는 게 서서히 물 먹는 솜이불 같은 거라, 점점 축축하고 무거워지는데 쉽사리 빠져나가질 않는다는 것까지도 깨달았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러나저러나 나이를 먹으며 그럭저럭 덜 해졌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언제 그랬었나?"까지는 아니어도 상태가 꽤 나아진 후에 생각해보면 우울을 누그러뜨릴 답을 하나씩은 찾게 된다. 문제는 다음 연도나 어떤 계기로 다시 우울이라는 늪에 허리께쯤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다. 미리 찾아뒀던 답들이 대단치 않게 느껴져 버리는 것이다. 내가 상대해야 할 덤불의 굵기는 손목만 해 보이는데, 이미 아는 답은 평소엔 커다란 톱이나 칼 같았다가도 그 상황에서는 녹까지 슨 커터칼같이 느껴진다. 심지어 어디에 뒀는지도 가물가물한.



우울이나 슬픈 생각은 내리막길에 굴려 둔 눈덩이 같아 빠르게 내게 굴러온다. 예쁘지도 고상하지도 않다. 돌과 갈색으로 변한, 다 젖은 낙엽과 솔잎을 박고 우울이 나에게 부딪치면, 헤어날 수가 없다.


이렇게 우울한 기분에 빠져서 취업은 언제 하지, 면접관들은 이런 걸 기가 막히게 캐치한다던데. 나는 스펙도 없고, 외적으로도 멋진 사람이 아닌데. 인간관계는 왜 이렇게 맘 같지가 않지. 완벽했으면 좋겠는데, 왜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놓지를 못하지. 연애는 언제 할 수나 있을까? 이런 상태로 연애는 너무 상대에게 실례가 아닐까. 그래도 누군가는,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 따위의. 꺼내 말하고 인정하기 속상한 이야기들을 되뇌면서 나는 더, 더 부패한다.


단 걸 먹고, 몸을 움직이고 무언가를 활동적으로 하면 아주 조금씩 이 칙칙함이 가시리라는 걸 알면서도 '내일 해야지' '다음에 해야지'부터, '이게.. 한다고 정말로 해결이 되는 거긴 할까? 높이 날수록 추락만 더 깊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쏘우'에서 그런 장면이 있다. 쇠사슬에 묶인 발. 주어진 건 실톱. 제한시간은 3분이었나, 여튼 긴박함을 느끼기엔 충분히 짧은 시간. 그런 상황에서는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되기 쉽고 우울이라는 쇠사슬이라는 내 발목이 자르기 쉬워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시간을 헤쳐나가기보다는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이 시간을 헤쳐나가기보다는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다. 사소한 일이 버겁고 당연한 일이 정말 그 조금도 당연하지 않아 지는, 이 우울한 시간을 어쩌면 좋을까. 작년까지와 딱 하나 다른 점은 이걸 누군가 볼 수 있는 곳에 적고 있다는 것이다. 신발 상자를 하나 가득 채웠던 내 공책들. 단 한마디의 욕이 적힌 날도 있었고, 일곱 장 반의, 정리 안 된 감정의 소용돌이가 활자를 뒤집어쓰고 도사리게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감정을 썼다. 차마 다시 꺼내어 읽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날은 배설했고, 어느 날은 표현하고, 어느 날은 갈망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그나마 내가 끝까지 잠식되지 않으려는 나름의 발버둥이라고 생각해주면 감사할 것 같다.


태생이 긍정적이고 활기찬 인간은 아니라 오히려 '힘내'라는 말을 들으면 '야 그게 더 힘 빠져..' 하며 힘이 빠지는 족속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기대나 바람은 있으니 언젠가는 내가 이걸 서투른 대로 괜찮은 글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 칙칙함과 우울 속에서도 써냈던, 신발 상자 속 글들, 무질서한 활자들을 써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미쳐 버리거나 더 큰일이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좋아하는 음악과 글, 영화들 역시 보통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같은 빛보다는 슬픔을 슬픔으로 벼려내어 어두운 곳에서 은은히 빛나서 좋아했으니, 나도 내 스스로에게 그런 걸 주고 싶다는 생각이니까.


나는 나의, 나름의 위로였다.


    

우울할 때 끌어주고 맛있는 걸 먹고 힘내라고 으쌰으쌰 해주는 게 잘 맞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이 언제나 한결같지도 않으니 나도 가끔은 그런게 먹히기도 하니까. 하지만 내가 정말 바닥을 모르고 힘들었을 때엔 담담히 써내린 글과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듯한 영화와 노래가 날 조용히 위로했다. 그래. 아쉬우면 어떻고 내가 생각해도 어색해서 입꼬리가 구겨지면 어떤가. 나는 나의 나름의 위로라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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