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를 좋아하면 일단 기피하세요. 그의 사상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소개받은 자리에서 철학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더욱이 쇼펜하우어를 친애한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불과 일 년 전에 내가 했던 말이다.
순조롭지 못한 이직 생활에 고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자조하던 찰나,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다. 첫 번째 책은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이었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좋지 못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볍게 넘기려던 찰나 부제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 생각하십니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왜 힘들지 않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하게 힘든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고 고통은 부정적인 감정이니 절대로 나는 힘들고 싶지 않다고 결론을 지어도 됐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어폐가 있다. 나는 고통스러운 운동을 하고 고통스러운 찬물목욕을 한다. 그리고 현대의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고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 또한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앞서 말 한 고통들은 전부 나에게 긍정적인 생활을 안겨주었다. 일찍 잠에 든 나는 이른 기상이 힘들지 않았다. 충분한 수면은 그날의 모든 일과를 무리 없이 이행하게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모두 이수한 하루는 그 어떤 때 보다 행복하다. 고통을 가까이 둘 수록 행복도 함께 딸려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모든 것을 놓고 싶을 때가 있다. 자발적으로 무적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내 인생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부정적인 생각을 한나절동안 해 봤자 바뀌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정신만 피폐해질 뿐 거듭된 자조가 인생을 평탄케 하지는 못한다. 절망은 궁극의 희망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논지 덕분에 지금 느끼는 절망과 고통이 오히려 긍정의 신호로 인식된다.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고통을 가까이할 것이다. 그래야만 작은 행복이 적확하게 인식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