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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권 Mar 16. 2024

인생에서 고난은 단비와 같다

평생 행복한 사람은 없다




    초가 쌓여 분이 되고, 분이 지나 시간이 된다. 그 시간은 결국 하루가 되고 하루가 일곱 번 반복되면 일주일이 된다. 일주일이 대략 네다섯 번 정도 지나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열두 번 지나야 비로소 한 해가 된다. 때문에 나는 겨우 1분이라도 시간이 지나는 게 참으로 안타깝고, 아쉽다.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며 보내는 잡을 수 없는 하루가 한탄스럽다.


    사람은 고단할 때 단단해지고, 고난이 찾아와야 성장한다. '왜 나만 힘들까'라는 생각으로 자조하기보다는 오히려 반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절반은 고단할 것이고 남은 오 할 중 삼 할은 불행할 것이다. 삶의 과반수가 결국 악의로 가득한데, 그것을 부정한들 행복이 찾아올 리 만무하다. 가뭄 후 내리는 비가 단비라고 불리듯, 행복 또한 마찬가지다. 불행을 겪어야 행복을 알고, 아픔을 겪어야 멀쩡함을 안다. 늘 탄탄대로만 걷는 사람은 그대로가 얼마나 좋은 길이지 알지 못한다. 개똥 밭에서 굴러본 사람이 잔디밭에서 구른 들 크게 고통스럽진 않을 것이다.


    산을 오를 때, 오래 달릴 때, 근력 운동을 할 때 모두 고통스럽지만, 결과물은 단비와 같다. 아침에 일찍 일어날 체력을 선사하고, 노화의 속도를 늦춰주기도 한다. 더욱이 죽기 직전까지 고통에 몸부림쳐야 할 가능성을 현저히 낮추기도 한다. 하루의 고통이 쌓여 마지막 영면에 가까울 때 덜 아프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복리의 효과인지 죽음 겪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무작정 인내하라는 소리는 아니다. 자신의 상황을 우선순위로 잘 살피는 게 중요하다. 어깨가 탈구된 상태로 노력을 외치며 운동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골반이 뒤틀린 상태로 뛰고 오르는 건 바보 같은 행동이다. 객관화가 일절 없는 인내는 고단도, 고난도 아닌 그저 자해일 뿐이다. 그러한 자해가 꼭 신체적 결함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맞지 않는 일에 고통받는 것, 나를 좀먹는 사람과 만남을 이어가는 것, 우울을 방치하고 그대로 두는 것 또한 인내가 아닌 자해다. 때문에 인내와 자해의 차이를 적확하게 인지해야만 고난을 얻을 수 있고, 고단한 삶을 즐길 수 있다.


    고단한 삶에는 항상 즐거움이 함께하고 작은 행복이 머리를 빼꼼 내밀고 있다. 이것을 단 하나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고단한 삶이 아닌 단순하게 괴로움 삶이다. 고단 속의 고난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는데 절대로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소중한 사람이 영면에 든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고 있다. 그러한 고난은 힘들지만 충분히 버틸 수 있고, 심지가 더욱 단단해지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그것이 순리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이어져야 하는 삶을 끊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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