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대척점
명이 있어야 암이 있듯이, 절망이 있어야 희망도 있다. 실패 없이 나아간 길에 희망이 있을 리 만무하고, 어리석은 믿음만이 존재할 것이다. 희망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행하다. 희망을 전도하는 사람들 또한 불행하다고 볼 수 있다. 그 불행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는 이타적인 사람이 '행복전도사'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들은 방치된 우울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우울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행복과 희망을 주창하며 강연을 이어나가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긍정과 부정 또한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다. 무한긍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그렇게 보이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선과 악을 극명하게 가르는 극단적인 멍청함이다. 세상에는 완전무결한 선도 없고 절대 악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좋으면 선이고 싫으면 악으로 치부하는 것이 인간이다. 무시와 존중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해석된다.
양 극단을 정확하게 계량하거나 아니면 완전하게 한쪽만 가지고 있을 수 있다면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전 세계 사람이 행복하기만 하고, 서로 양보하고, 희망찬 미래만을 그리며, 부정을 부정하는 아주 건강한 사람들만 남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 세상은 결핍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발전도 없을 것이고, 무료함만 남게 된다. 최종으로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존엄성도 사라질 게 뻔하다. 그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향이 아니다. 그러한 세계에는 신을 믿는 사람들 또한 없을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희망을 갖고 하루를 살아내기만 해서는 상황이 나아지기 어렵다. 오히려 부정적이고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싫어하는 이른 잠은 숙면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다음 날 활기찬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도와준다. 고통스러운 운동과 찬물 목욕은 건강한 도파민 향상이라는 효과를 나타낸다. 귀찮은 청소와 빨래 그리고 설거지는 공간의 청결을 의미한다. 하기 싫은 공부와 독서 및 작문은 우리의 지적 능력을 높여준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과 타협하여 모든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그토록 원하는 행복을 거머쥘 수 없다. 행복은 아주 짧고 불행은 아주 길고 고통스러울 테다. 행복을 얻고 싶다면 오히려 불행하다고 느끼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고, 나도 하기 싫어하는 일에 뛰어든 사람은 역설적이게 행복해진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게임이나 단음식 그리고 무분별한 섹스는 평생 누려야 하는 작은 행복들을 끌어다 쓰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잔고가 바닥나는 순간 그들은 어떠한 희망도 긍정도 얻어낼 수 없게 된다. 반면 절망과 부정을 벗 삼고 이겨낸 사람들은 평생 동안 꾸준하게 작은 행복의 맛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