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그 사람이 꼭 내 곁에 있는 것 같다. 마치 잠에 들기 직전에 생각하던 것이 꿈이 되는 그런 현상 말이다. 일련의 현상들이 내 망상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행복하고 싶어 만들어낸 환상이 꿈으로서 현현한다. 꿈에서는 그것이 현실이라 믿고 그 믿음이 깨지며 불안함이 엄습함과 동시에 팟 하고 깨어난다. 그렇게 어두운 정적에서 뜬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아니, 어디도 바라보고 있지 않지만 눈은 천장을 향해있다. 시계를 확인한다. 한숨을 내쉬고 다시금 눈을 감는다.
작별이 힘든 이유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법은 고독이 가장 좋다. 혼자서 눈물을 펑펑 쏟을 수 있는 공간, 혼자서 고통의 고함을 크게 내뱉을 수 있는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고독의 시간은 길면 길수록 좋다. 그렇게 차츰 나아지는 나를 볼 수 있다. 그런 시간에 흘린 눈물과 뱉은 고함은 절대 헛되지 않다. 물론 눈물과 고통에 매몰되어 자신의 할 일도 못 한다면 문제가 된다. 방전되지 않을 정도의 힘을 비축해두고, 자신의 할 일을 완벽하게 혹은 적당하게 또는 대충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일은 하등 도움 되지 않는다.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작별은 우리에게 엄청난 성장의 가능성과 큰 이로움을 선사한다.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발로 뻥 하고 차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허송세월 할 생각 자체를 접어야 한다. 그런 멍청한 생각은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직행시켜야 옳다. 스스로가 째마리가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2부 밤 - 2 그림자들]
반짝이는 모든 것에 감흥이 없었다. 누구와 함께 해도 반짝이는 것이 예쁜 줄 몰랐다.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옆에는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위치했다.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눈이 예쁘다며 읇조릴 때 나는 그 눈을 보며 예쁘다고 똑같이 말했다. 그렇게 반짝이는 모든 게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할 때 같이 보았던 눈은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않았다. 이제는 같은 것을 보고 있지 않게 되었다.
[2부 밤 - 3 바람]
세상에는 의미도 없고 뜻도 모를 악마들이 즐비하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외치며 자신을 변호하지만, 실상 그들의 실체는 자신 하나의 지위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소를 위한 대의 희생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모든 사람들의 절멸을 바란다. 변을 보다 죽은 그 사람처럼.
[2부 밤 - 4 정적]
비교적 진실한 사람들은 타인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 진실이 지속되어감에 따라 타인들의 태도는 당혹을 넘어 냉담함을 보인다. 이유가 무엇일까.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일까. 잘 모르겠다. 단순하게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진실한 사람들에게 붙는 수식어가 있다. 눈치 없는 사람, 입 바른말만 하는 사람, 불편한 사람,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딱, 어느 정도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겁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그 대단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까지 해서 사회성을 길러야 할까.
자기 계발서에서는 당장 직장을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달려가라고 한다. 그런데 자기 계발서를 읽은 지식인들은 '사회생활'이라는 말 앞에서 갑자기 겸손해진다. 아니, 비겁해지고, 졸렬해진다. "먹고살아야 하는데 어떡하나."라며 옹졸한 말만 내뱉는다. 그렇게 사회성이 낮은 사람들을 폄하하고, 낮게 본다. 물론 그들의 입에서는 "폄하는 아닙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뭐, 당연한 수순이다.
힘든 상황에서는 항상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직접 고립시키고 공허하게 만들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며 자조한다. 망각은 신의 배려라는 말이 있는데, 소중한 주변인들을 망각하는 것은 어떤 배려가 있는 것일까.
친구는 갑작스럽게 생긴다. 의도해서 생긴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다. 어쩌다 보니 친구가 되었고, 어쩌다 보니 의지하게 된다. 그렇게 누구보다 가까워지고, 살다 보니 주변인들과 같이 멀어진다. 그럼에도 위로가 되는 친구들이 있다. 언제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 말이다. 그런 친구들은 오랜 시간 친했던 만큼 오랜 시간 소홀했음에도 언제 만나도 어색하지 않고, 큰 위로의 말이 없어도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증오는 산불과 같다. 아주 작은 불씨가 삽시간에 온 산으로 번지듯 증오 또한 마찬가지다. 작은 불편함과 이상함 그리고 이질감이 어느 순간 아주 큰 증오로 변모한다. 그렇게 타인을 입맛대로 변형시켜 바라본다. 여기서 바라본다는 말은 두 눈으로 실제 바라본다는 말이 아니다. 괴물로 변형시킨 타인은 내 머리 안에서만 살아가기에 눈이 아닌 생각으로,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말이다. 증오의 대상을 찾는 사람들은 언제나 군침을 질질 흘리며 먹잇감을 찾기 위해 좌중을 두리번거린다.
희망이 절망보다 무서울 때가 있다. 극에 달한 선이 보편적인 악보다 두려울 수 있듯이 극점을 찍은 희망은 보편적인 절망보다 폐쇄적이다. 그 희망은 눈을 감고 귀와 코를 막고, 입을 닫는다. 할 수 있다면 숨구멍 까지도 막거나 닫을 정도의 철통보안을 유지한다. 차라리 절망을 택하는 쪽이 더 생산적일 정도의 희망들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오롯이 그 희망에 잠식되어 천천히 죽어갈 뿐이다.
불안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직접 불안을 만나러 가거나 불안을 초대하고 스스로 만들어낸다. 마치 불안하지 않은 인생은 실재 인생이 아니라는 듯이 계속해서 불안을 자아낸다. 만들어진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타인과의 상담으로도, 약의 도움도 효과는 미미하다. 아무리 대단한 상담을 한들 의지가 없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저명한 의사가 처방한 약도 마찬가지다. 믿지 않고 개선할 용의가 없는 상태에서 어떤 약을 먹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안은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가 불안을 찾아간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은 불안조차 기어이 끄집어내 찾아낸다.
[2부 밤 - 5 낙하]
보고 싶지 않은 것에는 시선을 두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어떤 것은 끝내 시선이 다다르게 된다. 거기에 초점을 두면 고통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멍청하게 보게 된다. 이성의 시야가 흐려지고, 순간의 욕망이 초점에 박혀 그것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럴 때면 살아있는 채로 안구를 적출당하는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 의지가 허물어진다.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눈물 흘릴 필요 없다. 보게 될 사람은 결국 다시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때도 늦지 않다. 교류가 없을 때 생긴 서로가 모르는 추억의 이야기를 마구 내뱉을 시간은 길고도 길다. 심지어 추억의 이야기가 끝나고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갈 시간 또한 많다. 더해서 보고 싶은 사람은 아닐 수 도 있으나 보게 될 사람으로 인해 모든 것을 다 극복할 힘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울면서 마음의 내구도를 깎아댈 필요가 없다. 단단하게 버티며 앞으로 걸어 나가면 된다.
[2부 밤 - 6 바다 아래]
어떤 사람과의 결속이 풀리고 나면 우리의 뇌에는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분열된다. 결속되어 있던 사람과, 결속이 풀린 사람 둘로 말이다. 결속되어있을 때의 사람을 생각하다가도 결속이 풀린 사람을 떠올리며 고개를 홱홱 젓는다. 그 둘은 절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그리워하는 인물은 결속되었던 옛사람이며 다시는 없을 사람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고 있음에도 머리에서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때 왜 그렇게 하지 않았냐.'며 나만의 방법이 절대 공식인 것처럼 넘겨짚고 조언할 때가 있다. 타자에 대한 추측과 확신은 절대 해서는 안되지만, 한다고 하더라도 이빨 사이로 그 추측과 확신을 내뱉어서는 안 된다. 타자는 항상 나름의 방법을 있을 테고, 그들이 어떤 지옥의 사선을 넘어왔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살갑게 불러 준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 소리에는 사랑이 담겨있다. 의식적인 사랑이든 무의식적인 사랑이든 나를 불러주는 소리에 담겨있는 정은 시간이 지날 필요도 없이 당장 행복해진다. 더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이름을 살갑게 불러 준다면 당장 하직해도 좋을 만큼 행복하다. 더 불러달라며 애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3부 불꽃]
다음을 기약하는 것은 어쩌면 비겁한 행동일 수도 있다. 다음이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다음을 말한다. 우리의 삶은 내일이 없을 수도 있고, 심지어 지금 당장 현재가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다음이라는 말은 무책임하고, 거절보다 더 잔인한 말이다. 상대에게 다음이 없다면 내가 말하는 다음은 희망고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아니, 행운을 넘어선 천운이다. 세상 사람 누구나 돌아갈 곳이 있지는 않다. 그것은 한 사람이 세월을 거듭 살아갈수록 점점 희박해진다. 이내 돌아갈 곳은 없어지고 돌이킬 수 없는 자신만이 남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어느 시간, 어느 시기에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천운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돌아갈 곳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것을 감성과 감정으로 만들기 어려우니 돈에 의존하려는 게 아닌가.
사랑만 듬뿍 쥐어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받을 수 있는 한계치는 생각하지 않은 채 강제로 사랑을 채워 넣었다. 항상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타인의 기대까지 쏠린 사람에게 사랑을 채워 넣는 것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사랑과 기대를 받을 자리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데, 계속해서 밀어 넣게 되면 이내 터질 수밖에 없다. 흘러넘쳐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들에게는 소유 없고 기대 없는 사랑이 필요하다. 가볍지만 절대 쉽지 않은 그런 사랑 말이다.
타인을 구한다는 것은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들보다 하등 나을 것 없는 내가 무슨 힘으로 도움을 줄 수 있나. 구원이라는 명목 하에 다른 개목줄을 채울 수도 있다. 선으로 시작한 일이 실재 선으로 끝이 날지도 의문이고, 끝이 없다면 평생 선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있을지는 더욱 의문이다.
고통의 순간에는 이상하리만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흘러 돌아봐도 그렇다. 그땐 왜 그렇게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을까 생각하면 양 팔에 소름이 돋는다. 그렇지만 조금의 쾌감도 있다. 그런 순간에는 항상 어떤 식으로든 성장이 보상되어 왔다.
죽음으로서 모든 게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 생각에 매몰되어 옥상 난간에 두 다리를 올렸을 때조차 번쩍 하고 떠오르는 무엇인가는 없었다. 난간에 올린 두 다리가 이내 허공으로 내던져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무엇이 더 남았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갈래길들이 나타나 나를 즐겁게 해 줄지에 대한 확신들도 난간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이내 난간에서 내 두 다리를 내린 것은 희망도 절망도 아닌 부끄러움과 죄책감이었다. 가족에 대한 부끄러움이 작게 다가왔고, 어린 생명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크게 다가왔다. 이미 나를 인지하고 있는 작고 여린 생명이 받을 충격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밀려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살아야 할 이유를 간절하게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아직 나에게도 불이 있을까. 타인의 마음을 포근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줄 불이 남아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