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읽고 에세이 <6화>

한강 장편소설

by 박진권

[채식주의자]

나는 잡식이다. 채식과 육식을 좋아한다. 둘의 조화를 이루는 샤부샤부를 사랑한다. 육식으로 인해 동물들이 피해를 보는 일은 당연히 안타깝다. 식용 개고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개고기를 먹진 않지만, 닭이나 소같이 도축한다면 반대할 의사도 없다. 왜냐면 나는 고기를 먹기 때문이다. 문제점도 딱히 동감하지 않는다. 동물의 권리보다 내 권리가 더 소중하고 나는 내 권리를 평생 누리며 살 테니까. 동물들은 우리의 친구가 맞다. 그리고 우리의 먹이도 맞다. 부정하는 사람의 말도 맞다. 딱히 채식을 반대하진 않는다. 육식을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다.




걱정이라는 명목 하에 구원의 매질이 시작된다. 걱정은 이내 강요로 돌변하여 폭력을 낳는다. 걱정이 폭력이 된다. 그러한 걱정은 걱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폭력이었다. 폭력이 폭력을 낳은 것이다. 그것에 연민은 없다. 연민이 있을 리 만무하다. 타인에 대한 선한 마음은 절대 폭력을 낳지 않는다. 폭력은 이기심이고, 자기만족이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걱정은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에 문제점이 있다면 그 선택의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채식으로 인해 사람이 말라가고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이 보인다면, 동물성 단백질을 대신할 식물성 단백질을 주 재료로 요리를 하면 된다. 그리고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게 최선일 것이다. 사실 먹는 게 주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따뜻함으로 모든 것을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 내 사람을 방치해선 안된다.




사실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저 지켜보고, 응원하고, 품에 안고 같이 이겨낼 수도 있다. 그동안 가슴에 쌓인 생명의 응어리를 천천히 풀어낼 수 있도록 말이다.


[몽고반점]

'정상적인 것은 무엇인가요?' 들었던 질문 중 가장 철학적 인척 하는 역겨운 질문이었다. '정상, 비정상은 누가 규정하는 거죠?'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정상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짧게는 탈 없이 제대로인 상태를 뜻한다. 반대로 비정상은 정상이 아닌 것,으로 짧게 치부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상은 무엇인가.




정상에 답은 없다. 그러나 비정상은 분명히 존재한다. 말 그대로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세상에 미친 사람 하나 없다는 소리다. 연쇄살인마도, 강간범도 흉악범들 모두가 정상도 아니고 비정상도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그것은 비정상이죠!' 정상과 비정상은 누가 규정하나. 사회의에서 규정한 비정상은 거부하면서 사회의 규범이 정한 범죄자라는 것이 비정상인 것은 동의한다. 이보다 모순적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정상의 규정을 알 수 있나. 감히 말할 수 있나. 우리는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나.




정상과 비정상은 사람이 정한다. 아주 가볍게. 어떤 사람의 눈에는 정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남의 생각에 본인의 잣대를 들이밀 순 없다. 정상과 비정상은 분명 존재하고, 그 기준은 각자 다르다.




예술은 무엇인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의 틀은 있어야 한다. 위법에 해당하는 것과, 누가 봐도 위험한 일은 예술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것을 누가 정하냐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테다. 그것을 본 사람이 정한다고. 이것에 다수결은 없고, 그저 개인만 있을 뿐이라고.




예술은 인간의 이목구비가 만들어낸 것이다. 예술도, 법도, 어떤 틀도 인간이 만들었다. 그런데 예술만은 인간이 만든 틀에 속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예술도 결국은 울타리 안에서 창조되었다. 그 울타리를 넘는 순간, 혁신일 수도 범죄일 수도 있다. 천재와 정신병자 사이에는 종이 한 장보다 얇은 차이가 있다. 그것을 정확히 재단할 수 없다면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가올 참상에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릇에 맞는 예술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나무 불꽃]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른다. 죽음을 택하고, 무언가를 놓아버린 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항상 곁에 있는 죽음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살기 싫다는 실언을 뱉어낸다. 혹은 고통을 읇조린다.




역겨운 순간을 참는 행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순간은 천천히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렇게 쌓인 순간들이 무너질 때 스스로도 같이 무너진다. 그리고 의문의 자해가 시작된다. 물리적인 자해보다 느리고, 고통스러운 정신적인 자해를 멈추지 못한다.




술과 담배 그리고 무방비하게 마신 커피들을 즐겼다. 술맛은 몰랐으나, 취하는 것은 좋았다. 담배 연기가 폐부 깊숙이 때려 박힐 때마다 묘한 희열을 느꼈다. 고소한 원두향이 나는 커피를 하루에 두 잔 씩은 꼭 마셨다. 그렇게 끔찍한 가위눌림이 동반된 지독한 불면에 시달렸다. 이내 없던 비염까지 생기고, 비강 호흡 완화 스프레이를 달고 살았다. 내가 선택한 삶이었으나, 원했던 삶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찾아오는 행복에 겨워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담배와 술을 끊고 커피는 주에 한 번으로 줄이니 삶이 달라졌다. 고통이 많은 날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삶이다. 그럼에도 즐거웠고 행복했는데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의 서사는 숨 막힌다. 정말 행복한 게 맞냐고 묻는다. 너의 인생이 맞냐고 또 묻는다.




지금 사는 인생은 꿈일까. 그렇다면 꿈에서 깨어난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까. 어떤 사람일까. 사실 생이라는 것 모두가 꿈은 아닐까. 꿈속의 꿈속의 꿈... 끝없는 꿈들은 아닐까.


[해설 - 열정은 수난이다 <허윤진>]

어떤 사람의 음식에 대한 호 불호는 관심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자를 '적'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복수심에 눈이 멀어 틈을 노린다. 어떻게 보면 미쳤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복수심에 자신의 원래 잣대는 중요하지 않다. 자유를 외치던 자가 어느새 규칙을 들먹이며 제재를 가한다. 반대로 규칙을 중시하던 자는 자유를 탄압한다며 모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는 의외로 쉽게 무마할 수 있다. 그저 수긍하고 따르면 된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실수에 크게 반응한다.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고 타인의 잘못에는 육중한 무게의 윤리의식을 들이민다. 과연 그들에게 그러한 자격이 있을까. 그 자격은 누가 쥐어 준 건지 그들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얼마나 떳떳한지는 그들 내면의 자아만이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꽁꽁 숨긴 역겨운 자아가 훤히 보인다는 것을 모른다. 그렇게 겉은 정상 인척 광기로 염색한 자신을 감춘다. 결국 타인을 속이기 위해 스스로도 속여버린다.




나누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쁨도, 슬픔도. 행운도, 불행도. 모든 것을 나누려고 한다. 어떤 관계든 모든 것을 나눌 수는 없다. 자신이 주창하는 "모든 것이 아니라 이 정도는!" 이러한 소리는 자신의 주관적인 정도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정도도 과할 수 있다.




부정적인 의미의 변했다를 말을 싫어한다. 원래 사람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지 않는다. 조금 더 뜨거울 때도 있고, 차가울 때도 있는 법이다. 물도 그렇지 않은가. 불 위에 올려두면 뜨거워지고, 냉골에 두면 차가워진다. 하지만 그것은 평생 유지될 수 없다. 실온도 마찬가지다. 바깥의 온도에 따라 온도는 미세하게 변경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몸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몸과 정신은 일체 된다. 강인한 정신은 강인한 육체에서 비롯된다.


[작가의 말]

한강 작가님의 책을 읽을 때면 의미 모를 답답함과 불안함이 느껴진다. 죄책감과 우울함은 덤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작가의 말을 읽은 지금은 후련하다. 마치 벌을 다 받은듯한 개운 함이다. 꿈도 희망도 없는 글을 읽으면서도 긍정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석해도 결국은 절망인데, 더 힘차게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렇게 오늘도 잘 넘긴다.


..jpg 일러스트 - studio.mindal [스튜디오 민달] (민달팽이의 작업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