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2부를 읽고 에세이 <4화>

에릭 와이너

by 박진권

[2부 정오 - 6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이루고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리고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을 묵살한다. 그 감정은 틀렸다고 조소한다.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타인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의견을 묻고 궁금해한다. 그들의 의견은 하등 나쁠 것이 없다. 해롭지 않다. 그렇게 해롭지 않은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한다.


염세주의적인 태도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죽음에 관하여 크게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실 무섭지도 않다. 무로 돌아가는 게 왜 무서운지 모르겠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존재하나 끝은 두렵지 않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그것은 세상 어떤 존재도 피해 갈 수 없다.




대단한 쾌락을 찾지 않는다. 엄청난 부와 명예는 중요하지 않다. 딱 지금 정도가 충분하다. 지금보다 더를 증오한다. 더 바라지 않는다. 더 원하지 않는다. 더 필요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평안하게 읽고, 쓴다. 도란도란 먹고, 마신다. 산책을 하고, 씻고 눕는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럼에도 분명 필요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욕망한다. 그럴 때마다 미래의 충분함을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고 다시 절제한다. 매사 원칙대로 지켜질 순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후회하지 않는다. 목표는 뚜렷하다. 충분히 괜찮다. 좋다. 더 필요하지 않다. 이것으로 됐다.




행복함 뒤에 따라올 고통이 더 큰지 작은 지를 철저하게 계산한다. 그리고 고통을 최소화한다. 그렇게 고통의 부재를 만들어간다. 평생 있을 고통이지만 최대한 절제한다. 더 이상 행복에 대하여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 조차 행복하다.


[2부 정오 - 7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뿌리내림>

조급함은 욕망의 갈증만 아주 잠깐 해소시키나 여유로움은 언제나 독 같은 인생도 해독한다. 득과 실을 따지지 않는 기다림은 항상 그렇다. 실패한 결과물들의 과정에는 항상 조급함이 묻어 나온다. 나는 내 노력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조급함을 버리기로 했다. 어떤 일에 있어도 조급함은 항상 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기로 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무엇을 기다렸는지도 모를 때까지.




쉽게 판단하고, 정의했다. 그렇게 오만함으로 비롯된 실수와 실패를 경험했다. 대가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은 참을 수 있으나, 다시 참기는 싫은 고통이다. 잘 참아내는 것은 가능하나 두 번, 세 번 반복된다면 결국 참아지는 절망으로 변모할게 뻔했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그래서 판단을 유보하고, 정의를 스스로 상실케 했다. 그럼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멍청한 행동은 기어이 해냈다.




내가 욕망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얻을 수 있는 것만 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 조차도 겉핥기일 뿐이었다. 원하는 것을 억제하려 한다. 더 이상 원하고 싶지 않다.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싶다. 그렇게 바라는 것 없는 기다림을 완성하고 싶다. 아직도 바라는 게 남아 있는데, 내가 진정 그것을 원한다면 원하지 않게 될 테다. 그렇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 현재를 바라보며 살고 싶다. 아득한 미래를 점치는 쟁이가 되고 싶지 않고, 과거 영광의 꿈에서 익사하고 싶지도 않다.




해야만 하는 노동을 하며, 글쓰기와 독서를 기계적으로 수행한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살아보려 한다. 꿈의 결실은 무수히 많고, 무엇을 잡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만사 뜻대로만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뜻을 여러 개 던져둔다. 무수한 결실을 맺을 수 있게 사방에 꿈을 던져놓고 그때그때 가고 싶은 길로 걸어간다. 그렇게 여유롭게 기다린다.


[2부 정오 - 8 간디처럼 싸우는 법] <바가바드기타>

토론의 목표는 항상 승리였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반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토론이라 함은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고 내 사상을 관철시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존중하거나, 상대 의견에 조금이라도 동의를 하는 토론은 없다. 그 어떤 토론회에서도 상대 의견을 존중하는 토론자는 없었다. 이준석, 진중권 모두 자신만 옳고 반대편은 틀렸다를 주창했다. 그래서 토론을 내려놨다.




반면 토의는 즐거웠다. 서로의 의견이 존중받았다. 가끔 존중받지 못할 때도 분명 있다. 기분은 상할지언정 자신의 부족한 지식을 질책하며 모멸감을 느끼진 않았다. 그냥 툭툭 털어낼 수 있었다. 나는 이겨야만 하는 토론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겼다. 그렇게 승패 없는 무수한 의견들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이 또한 비폭력의 한 부분이 아닐까.




항상 남자다움을 동경했다. 현대에 "남자가 남자다워야지"라는 말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발언임은 잘 알고 있다. 당연히 타인에게 '남자다움'을 강요하진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말을 만들었다. 남자다움이 아닌 '강자 다움'이라고 말이다. '강자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강자는 약자의 짐을 대신 들어준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한다.' 등 옛날의 기사도 정신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그 뜻의 폭이 어느 한 성별에 국한되지 않고 보호받아 마땅한 사람들에 대한 의미도 넓어졌다.




가족의 짐을 대신 들어주는 행위에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확장시켜 가족이 아닌 타인의 짐도 대신 짊어지려 노력한 기억이 있다. 당연히 쉽지 않았고, 실패했다. 그래도 그 과정이 나를 지탱한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해도 상관없다. 평생 실패만 한다 해도 괜찮다. 나는 그 과정을 즐긴다.


[2부 정오 - 9 공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법] <논어>

분명 나는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친절하고 싶다는 마음은 굴둑 같으나 여러 가지 핑계로 그것을 행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무지 성하게 남에게 피해를 주진 않는다. 그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성악설 성선설 관심 없다. 다들 자신의 얇은 지식의 한 페이지 안에서 악과 선을 규정하는 것이니까. 실제로 악은 무엇이며 선은 무엇인가. 절대악과 절대선이 존재할까.




인간의 규정은 마다 다르다. 성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논리는 '아이일 때를 보라, 순수악이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견해 차이로 쉽게 뒤집을 수 있다. 시작이 아이인지 어른인지 아무도 모른다. 감히 누가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백지설'에 한 표를 던진다. 성무 선악설처럼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본다. 선함과 악함의 기준은 시대마다 다르고, 선과 악의 규정도 못 지은 판국에 성선과 성악을 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나마 성선설을 믿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성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친절함은 연기다. 그들의 본성은 악이다.'라는 개소리를 주장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토악질이 절로 나올 정도로 역겨운 사람들이다. 차라리 '인간은 원래 악한데, 사회의 도덕과 윤리의 개념으로 인해 억제를 하는 것이다.'라는 의견에 찬사를 보낼 지경이다. 어떻게 살아야 타인의 순수선을 더 깊은 순수악으로 매도할 수 있을까. 대화조차 하기 싫은 인물들이다.




선과 친절에는 전염성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 타인의 선행에 대한 미담을 보고 듣노라면, 나 또한 당장 실천에 옮기고 싶기 때문이다.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이 따라올 테지만, 그럼에도 선을 행할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장족의 발전이다. 이후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생각을 넘어 행동까지 하는 것을 영상이 아닌 직접 목도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확실히 달라진다.




도로 위에 개가 죽어있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택배차는 비상등을 켜고 차를 천천히 멈춰 세웠다. 택배기사는 개의 상태를 보곤 차에서 빈 박스를 꺼낸 후 개를 담아 인도 위로 올려두었다. 그리곤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이내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 몇 년 뒤 나도 도로에 널브러져 있는 고양이 사체를 집어 갓길 바로 위의 인도로 옮겨놓고 해당 구청에 신고를 했다. 다시 차에 올라타 출발을 하고 나서 문득 그때의 택배기사가 떠올랐다. 잊고 있던 기사의 선행이 내 머리에 자동으로 각인되어 있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선행을 강요하진 않는다. 다만 세상 사람들 7할이 선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멋진 사회가 될까 기대한다.


[2부 정오 - 10 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베갯머리 서책>

좋고 싫음이 분명하지 않다. 같은 사람과 사물인데도 좋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도 있고, 싫어하는 것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렇게 많진 않다. 사실 모든 것에 무조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생각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대단하다 말 하긴 어렵지만 특별한 것에 이의는 없다.




글쓰기를 좋아한다. 에세이 형식의 글쓰기를 사랑한다. 직업적으로 가지진 못했기에 글쓰기가 싫었던 적도 없다. 그저 좋기만 하다. 내가 쓴 글을 다시 보는 것도 좋아한다. 잘 쓴 글이 아니라도 흡족하다. 글을 썼다는 것 자체가 자부심이 느껴진다.




진정한 기쁨을 평범한 기쁨이라 생각했다. 반대로 평범한 기쁨을 진정한 기쁨이라고 오해했다. 내가 생각했던 진정한 기쁨은 항상 뒷맛이 썼다. 너무 달콤했기에 모든 것이 쓰게 느껴졌다. 그렇게 기쁘지 않아 불행했다. 그러나 평범한 기쁨이라 생각했던 사소한 것들은 뒷맛이 없었다. 당장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기쁨들은 내게 불행을 선물하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느낀 게 속상하다. 평범하고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기쁨들은 진정한 기쁨이었다.




계절의 기쁨이 있다. 가을과 겨울 특유의 냄새를 사랑한다. 그 냄새는 온도가 낮아질수록 더욱 진하게 난다. 당시의 추억들과 함께 냄새가 뇌리를 스친다. 나는 계절의 냄새를, 추억의 냄새를 모든 긍정적인 냄새를 좋아한다.




나는 불확실성을 사랑한다. 이미 여러 책에서 많이 나온 말이지만, 불확실성은 축복이다. 확실한 인생은 재미도 없고 더 살아갈 이유도 없다. 그렇게 나는 덧없는 인생이 즐겁고, 언젠간 올 죽음도 두렵지 않다. 모든 불확실 속에서 얼마만큼의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불행이 있어야 행복이 있고, 불행을 줄여야 그만큼 행복이 커진다. 최대한 불행을 줄이는 인생을 살아갈 준비가 되어있다. 그렇기에 벌써 행복하고, 절망의 순간에도 금세 회복을 한다.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을 곁에 두기로 하였다. 매사에 불만이고, 남 흉보는 것을 삶의 진리로 아는 사람들을 밀어냈다. 그들에게서 도망쳤다. 그들의 한탄을 듣고 있던 내가 어느새 같은 분류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선택을 해야 했다. 이른 시일 내에 그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선택을 했다. 그렇게 긍정적이고, 타인을 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다. 나도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소한 긍정이 모여 태산 같은 긍정으로 변모한다.


..jpg 일러스트 - studio.mindal [스튜디오 민달] (민달팽이의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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