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단편집
[입동]
인생은 무수한 전환점의 연속이다. 그 전환점을 견딜 수 있는가와, 어떻게 이겨낼지는 개인의 능력에 달려있다. 다만, 대부분의 인간은 섬약하기에, 주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보탬이 생각보다 작은 힘조차 되지 않을 수 도 있지만, 사람들은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이바지하고 싶어 하고, 본인들도 구제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신이 충족되었다면, 고통받은 당사자가 무엇을 말 하든 이제는 떨치고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씻을 수 없는 구원의 매질이 시작된다.
[노찬성과 에반]
세상에 영원한 이별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은 이별은 분명 존재한다. 가령 죽음이라는 고별은 영영 볼 수 없는 송별과 같다. 사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 또한 영원한 이별은 아니다. 그저 작별일 뿐이다. 그러나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영원한 이별일 테다.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영원할 것 같은 이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죽음 앞에서는 무조건 경건해야 할까. 모든 사람들이 그럴까.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생소하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해 비겁할 수도 치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겉모습은 분명 경건하지만, 속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애도가 시작하고, 마음대로 끝난다.
[건너편]
헤어짐 이후 사람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당장에 조금의 변화가 있을 수 있으나, 결국은 같아진다. 성장의 거름이 되는 이별은, 상당히 아플 수 있다. 그 아픔을 어떻게 잊는가에 대한 고찰은 끊임없이 우리의 머릿속을 맴돈다.
당연하게도, 저마다 방법이 다르고, 고통의 깊이도 다르다. 그렇기에 나를 잘 모르는 타인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별 면역력이 더 중요하다. 조금 더 생산적일 수 있는 헤어짐이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좋다.
결국 이별은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강요받아야 한다. 이별은 개인적인 바람이고, 그 바람을 강요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사람은 이별에 대해서 더욱 초연하게 대해야 하며, 더 나은 삶으로 향할 거름으로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죽은 눈을 다시 살리고, 무엇이든 행동해야 한다.
이것도 저것도 어렵다면, 추천 하진 않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 부정을 제외하고, 받아들인다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준다.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한다.
[침묵의 미래]
글자는 여러 갈래가 있다. 쓰고, 듣고, 읽고, 말할 수 있다. 말은 해도 문제 하지 않아도 문제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말을 잘해야 한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말이 사라지지 않았음에 감사해야 하며, 그 말을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말로서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말은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언변이 뛰어난 사람은 타인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다. 대화를 통해 사랑을 할 수도 있다. 글자를 모르면, 문장을 알 수 없고, 문장을 모르면, 문맥을 알 수 없다. 그렇게 말을 잘할 수 없게 된다. 말은 잘하면 무조건 좋다. 다시, 글자는 말로 현현하고,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완성된다. 또 글로 나타내어 읽는 사람이 있어야 영원할 수 있다. 듣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없는 글자는 멸종된다.
[풍경의 쓸모]
형식적인 사람은 무섭다. 그 형식 안에 어떤 사람이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혹여 그 안에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더라도, 그것을 꺼내려한다거나 알고 있는 티를 낸다면 결국 형식적인 사람에게 배제될 가능성이 다분해진다. 단순히 배제되기만 한다면 오히려 문제가 없다.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데 보통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배제와 동시에 음해를 가한다.
타인을 음해하는 것은 타자의 동의를 얻는 데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다. 그렇기에 세상은 형식적인 사람을 어른이라 표현하고, 형식적이지 못 한 사람을 아직 어린 사람이라 명명한다. 그렇게 대단한 어른들은 형식적이게 앞에서는 웃으며 뒤에서는 헐뜯기를 반복한다. 본인들의 온몸 구석 뜯겨나간 상처는 절대 보지 못하고, 자신을 뜯은 사람과 자신이 뜯을 사람을 대할 때 형식적인 자세를 취하며 관계를 이어나간다.
[가리는 손]
한 가지의 지고한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흑과 백, 선과 악, 명확하게 둘로 나누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대단히 단편적이다.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 무조건 선이 아니듯, 타자에게 관심이 적은 사람이 무조건 악은 아니다. 자신의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는 인간들은 타인에게 들이대는 선의 잣대는 상당히 높은데, 자신에게는 낮은 잣대마저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나의 선과 정의 그리고 배려와 존중 등 선하다고 일컫는 여타 모든 말과 글 행위들은 내 안에서만 요동쳐야 한다. 남은 남일뿐이고, 그들은 그들만의 정의에 대한 정의가 있다. 그렇기에 남에게 들이대는 칼날의 방향을 나에게도 향할 수 있어야 한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만사가 고통일진대 우리는 왜 살아갈까. 기어코 살아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죽지 못하는 게 아니라 죽고 싶은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아야 할 변명들은 너무 많다. 내가 죽으면 가족들이 슬프니까, 조금 더 살아보자. 난 아직 못 해본 게 많으니까. 조금 더 살아보자. 죽기 싫으니까. 살아보자. 얼마나 살지? 당연히... 운명이 허락한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