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올랐다. 발목에 추를 단 듯,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다리는 점점 무거워졌다. 인내를 하며 도달한 곳은 녹색이 칠해진 인위적인 평야와 같았다. 한 걸음, 또 한걸음. 이내 녹색의 평야를 넘어 가파르게, 바람을 가르며 더욱 빠르게.
[2]
파란색 하늘이 주황 옷을 입은 후의 한적한 골목길, 나는 목적지 없이 선선히 부는 바람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그 바람은 내 머릿속 어딘가를 휘젓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인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걷기로 했다. 왼발, 오른발, 다시 왼발, 오른발,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속으로 되뇌며 앞으로 나아갔다.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며 전진했으나 시선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초점 또한 뚜렷하게 한 곳을 주시하지 못한 채 산개되어 있었다. 앞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한 치 앞도 살피고 있지 않았다.
잔잔한 바람은 어느새 도심으로 나를 인도했다. 돌연 찬란해진 주변 배경에 흠칫 놀랐다. 행선지 없던 발걸음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반년만에 마주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때문에 등줄기에서부터 식은땀이 흘렀다. 어쩔 줄 몰라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신발 끝으로 고정했다. 갑자기 누군가 폐를 움켜쥐는 것 같은 통증이 나타났다. 끅끅 거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다리마저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수군거림은 내게서 정신마저 앗아갔다.
네모난 가게에 반짝이는 간판. 그 안에 가득 찬 사람들과 상이하게 내 머릿속은 텅텅 비어있었다. 유리에 비친 나는 역겨울 만큼 초췌했다. 창 너머의 그들은 마음껏 웃었고, 서로에게 긍정만을 선사하는 듯 보였다. '무엇을 해야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나는 씁쓸함을 끌어안고 시선을 거두었다. 타인의 행복을 더는 목도 할 자신이 없었다. 다시금 놓친 바람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눈부신 건물 숲을 뒤로했다.
[3]
"나는, 안정적인 사람을 원해. 조금 지루하더라도, 내게 안전한 보금자리를 선사할 수 있는 인간을 바란다고.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고, 곁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성인을 갈망해.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불안하고, 네 곁에 있는 나는 항상 위태로워."
[4]
바람은 인적 드문 주거구역에서 나를 기다렸다. 고요하지만 매섭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안내했다. 그 종착지는 건설 막바지에 짓다 만 폐건물이었다. 물끄러미 올려다본 건물은 어쩐지 고요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듯했다. 오싹한 마음을 접어둔 채 뚜벅뚜벅 폐건물로 향했다. 유리로 된 문에는 빨간색으로 [출입 금지]가 쓰여있었다. 손잡이는 쇠사슬로 칭칭 감겨있었고, 그 사이에는 사람 손만 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당연히 열리지 않을 문을 잡고 두어 번 당겼지만 역시나 꿈적도 하지 않았다.
거의 완공에 가까운 폐건물이라 주변에는 벽돌 조각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물의 창문들을 주시하며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짐작대로 건물 반대편에 위치한 창문이 보기 좋게 깨져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깨진 창문을 활용해 건물 내부로 무사히 입성했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은 건물 내부를 더욱 컴컴하게 만들었다. 결국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한 채 계단을 찾는 수 말고 다른 방법은 존재치 않았다.
압도적인 어둠에 삼켜진 시야는 재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계단을 찾을 수 없었다. 이 건물에 계단이라는 게 존재할까 싶던 찰나 휴대전화가 비추는 곳에는 인부들이 사용했던 철로 만든 가계단이 위치해 있었다. 나는 기어이 그것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곧이어 계단을 올랐다. 발목에 추를 단 듯,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평소에는 발휘하지 않았던 인내를 하며 도달한 곳은 진한 녹색이 칠해진 옥상이었다. 나는 정면을 응시한 채 천천히 난간으로 향했다. 곧이어 난간 끝에 두 발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