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를 읽고 에세이

<22화> 작가 - 이기주

by 박진권



언어의 온도
이기주





[서문 - 당신의 언어 온도는 몇 도쯤 될까요]

[사람]

소위 할 말 다 하는 인간들은 주변에 사람이 남아있기 어렵다. 그들은 불편한 감정을 빠르게 해소할 수 있는 대신 곁에 있는 사람의 인내심 또한 소화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보통 말의 온도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게 자유로운 편이다. 화는 나지 않지만, 분노해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는 조금 더 두꺼운 목소리로 천천히 노여움을 표현한다. 그러나, 절대 화를 내서는 안 되는 자리에서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유지한 채 단답으로 그 상황을 모면한다.


이처럼 말의 시현을 여러 가지 갈래로 사용할 수 있는 반면, 따뜻한 말과 공감의 단어를 활용하는 것은 아직도 미숙하다. 이따금씩 미비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억지로 감정을 자아내 보았지만, 매번 허사였다. 타고난 심성과, 숙달된 진심은 만들어질 수 없는 자연과도 같아,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001 말, 마음에 새기는 것]

<더 아픈 사람>

[사랑]

나는 20대 후반까지 정상적인 사랑을 하지 못했다. 과연 정상적인 사랑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직도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이 '이것은 분명 적확한 사랑이었다.' 싶은 사람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를 절실히 사랑했을 때조차 사랑이 무엇인지 인지할 수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이별했을 때야 말로 비로소 사랑을 알 수 있었고, 나아가 이별의 고통마저 깨우치게 되었다.


매번 사랑의 이기심에 지치고, 모순에 놀라지만 다가오는 이타심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 황홀함에 다시금 사랑을 하고 싶어 진다. 사랑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이별은 고통이지만, 성장의 시초가 될 수 있으며 그 기간은, 사랑한 만큼 길어 오랜 시간 끊임없이 발전될 수 있는 각성제이기도 하다. 사랑은 무수히 많은 실패 속에서도 긍정을 찾게 도와주는 구원의 밧줄임이 분명하다.






<말도 의술이 될 수 있을까>

[가장]

아버지는 꽤 오랜 기간 병마와 처절한 사투를 벌였는데, 단 한 번도 삶과의 절연을 표출하지 않았다. 깊어진 병마를 이겨낼 도리는 없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묵묵하게 감내했다. 몸의 내구성이 남들보다 가파르게 깎여 나가는 중에도 오랜 시간을 일하는 데 투자했으며, 많은 것을 자식들에게 베풀었다. 그럼에도 더 주고 싶었다며 매번 자조의 음성을 나타냈다.


아버지는 영면이 가까워질수록 수척해졌고, 신경질적이게 변했지만 내면의 따뜻함은 변치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보고 싶어 하셨고, 내가 어떤 말을 내뱉어도 개의치 않아했다. 그래서일까, 12년이 지난 지금도 꿈속의 아버지를 마주할 때면 그리움에 늘 오열을 동반한다.






<사랑은 변명하지 않는다>

[사랑]

나의 사랑은 언제나 변명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상대가 원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고 서로가 힘든 이해를 강요했다. 내가 이만큼 감내했으니, 너도 참아야 한다는 이론은 사랑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서로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가장 쉬운 길이 있음에도 그 방법에 대한 효용은 무시한 채 독선적이고 위험한 사랑을 지속했다.






<틈 그리고 튼튼함>

[부정]

확신이 없는 완벽을 기할 때 오는 문제들에 대해서 매번 골머리를 앓았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결함은 뒷전에 두고, 시선에 걸리는 모든 틈은 채우고, 메우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의 부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 부정의 결과는 늘 긍정이었다. 부정이 부정으로서 마무리되지 않고, 긍정 또한 긍정으로서 결론 나지 않으니 납득되지 않고, 힘들면서도 부정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말의 무덤 언총>

[토의]

타인과의 언어적 교류는 스스로의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을 수 있고, 견문이 넓어지는 이로운 활동이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은 뱉고 나서 주워 담는 게 어렵고,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만 하기 때문에, 마음껏 풀어놓을 수도 없다. 말은 하면 할수록 실언이 잦아지고, 그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잘못된 정보도 깊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독서모임에서 말의 총량을 줄이는 게 너무나도 어렵다. 타인들과의 토의는 내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서도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냥 한 번 걸어봤다>

[그냥]

한결 같이 소중한 사랑에는 항상 그냥이 내포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 이유 없이 전화를 걸고 싶을 때, 혹은 이유가 너무 많아서 한 가지로 압축해서 말할 수 없을 때 나는 '그냥'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냥 보고 싶어서 또는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이처럼 따뜻함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의 그냥은 끝없는 행복의 함축이다.






<여전히 당신을 염려하오>

[걱정]

내가 하는 걱정은 대부분 쓸모없는 생각 때문에 나타난다. 근래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주 요소인데, 이유는 현재 노력이 부족한 나 때문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제외한 외부 요인을 물색하기 바쁘다. 그러니 좀처럼 불안은 가시지 않으며, 오히려 자조적인 상태에 빠져 더욱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안이하게 누워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간다. 그렇게 서로 상반된 생각들은 정신적 고통을 만들어 내는데, 그 괴로움과는 달리 신체는 드러누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반복되는 나태의 진통에 고초를 겪는 것이 끝날 수 있는 방법은, 정신을 차리고 외부 요인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수 밖에는 달리 방법이 존재치 않는다.






<당신은 5월을 닮았군요>

[사과]

돌려서 말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조심스럽고, 착해야만 하는 분위기에서는 조금 순화해서 전달하긴 하지만, 그도 잠시 어느샌가 다시금 직설적으로 말하는 나를 발견한다. 흠칫 놀라 입을 닫았을 땐 이미 다 뱉어낸 다음이라,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것을 포장하려 해 봤자 사태는 더욱 악화될 뿐 긍정은 없다. 그렇기에 겉치레 대신 사과를 하는 게 더 편하다. 마음에도 없고 형식뿐이라 해도 이보다 좋은 실수 후의 수습은 찾을 수 없다.






<목적지 없이 떠나는 여행>

[연인]

연인은 물, 불 가리지 않고 열정적이며, 세상을 간질이는 것처럼 낭만적인 것도 좋지만, 결국에는 가치관이 동일해야 한다. 관심사는 감내할 수 있고, 취미는 만들어낼 수 있지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온연한 가치관은 거의 틀어질 일이 없다.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둘의 열렬한 사랑은 결국 불타 재만 남을 것이고, 낭만은 한심함으로 변모할 게 뻔하다. 이후 다가올 재앙과도 같은 아픔은 온전히 혼자서 감당하고 홀로 극복해야만 한다.


서로에게 희망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길게 또는 평생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적확한 방법은, 사회적인 시선과 상관없이 서로의 가치관만 동일하면 된다. 남들보다 덜 열정적이고, 덜 낭만적이어도 가치관이 동일한 연인들의 열정과 낭만은 더욱 오래 빛을 발할 것이 분명하다.






<부재의 존재>

[자조]

아버지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부터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슬픔에 잠겨 계속해서 소년으로 남고 싶었는지, 가족들에게 피해만 끼치며 이기적인 아들, 동생으로 삶을 영위했다. 제멋대로 하고 싶은 것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는, 그 이기심을 더욱 부추겼고, 매번 자기혐오와, 연민이 맞물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나는 가족을 버리고,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필두로 내세워 군대로 도피했다. 오롯이 나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 이기적인 집단에서의 나는 빛났고, 편안했다. 마치 제 집을 찾은 것처럼 아무 걱정이 없어졌으며, 한정된 공간에서 지정된 일이지만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치우며 가짜 행복을 만들어냈다. 무한한 이기심에서 생성되는 행복은 결국 내 발가락부터 시작해 온 몸을 좀먹을 수도 있다는 것은 전역이 다가온 날에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전역 당일날,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내 전역을 축하해 주던 이등병이 3m 높이의 난간 밑으로 머리부터 떨어진 것이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내 시선은 난간 밑으로 향했고, 이등병의 머리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으며, 새하얀 수건을 세상에서 가장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당시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인생에서 몇 없을 가장 기쁜 순간마저 완연하게 만끽할 수 없구나, 스스로의 이기심 덕분에 나는 행복할 수 없구나. 이 순간마저 내 순간이 아니었구나.' 그렇게 이등병에 대한 걱정 보다, 나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전역했다는 기쁨을 말소한 채 천장을 바라보며 몇 시간 동안 자조했다. 그렇게 모든 게 망가지고 있을 때쯤 소대장에게 문자가 왔다. 전역 사진은 올리지 않았으면 한다는 문자였고, 나는 사진 모두를 복구할 수 없게 완전하게 삭제하며 생각했다. '뭐, 별 일도 아니네. 이 새끼도 지 안위만 생각하는 버러지였잖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렇게 웃음과 함께 뒤로 흐르는 눈물을 소리 없이 삼켜냈다.






<길가의 꽃>

[장소]

특정 장소에 위치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푸른 잔디는 드넓은 곳에서 자라야만 더욱 빛나고, 오색 찬란한 꽃들은 화단에 있어야 예쁜 법이다. 뽑히고, 밟힌 잔디는 왠지 모르게 애잔해서 눈을 감게 만들며, 꺾인 꽃들은 어디에 있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시들어 그 빛을 다한다. 그러니 손에 넣은 곧 사라질 예쁨보다는 손에 닿지 않아도, 시야에 걸쳐져 있는 오래가는 예쁨을 더 사랑한다. 이것을 상기하려 매번 애쓰며 부단히 노력하는 삶을 살아간다.






<진짜 사과는 아프다>

[사과]

나는 완벽하게 내 잘못이 아니라면, 타인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다. 관계의 문제는 결국 양쪽 다 잘못이 있는데, 굳이 내가 먼저 사과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볍게 하는 '미안.'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진정성이 담겨있는 '죄송합니다.', '미안해.'는 가족을 제외하면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만나지 않거나, 그냥 무시하면 될 사람에게까지 사과하면서 그 관계를 이어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법>

[진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진실을 품고 살아간다. 그것을 남에게 표출하려 애쓰는 사람도 있고, 타인의 인식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 예전의 나는 타인에게 내 억울함을 호소하고, 진실을 배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오해받는 것은 끔찍하게도 싫었기 때문이다. 글의 흐름상 당연하게도, 모두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대응이 필요한 법이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보편적인 사람들은 자신을 변호할 때 객관적이기 어렵고, 스스로의 말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타인에게 공감을 불어넣지 못한다면 결국 불편한 진실이 돼버린다. 아무 말도 안 하니만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대응이 좋다.


어떤 사람은 내 성격을 바꿔 말하고, 능력을 힐난했으며, 사정을 마음대로 유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짜 진실은 마치 진짜인 것처럼 활개 쳤고, 타인들은 그것을 철석같이 믿어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대응하지 않았다. 남을 물어뜯기 좋아하는 인간들은 결국 새롭고 신선한 먹잇감이 나타나면, 하이에나처럼 그 주위를 배회하며 빈틈을 노리는데 시간을 소모할 것이고, 그가 무너지기를 기다리느라 나를 잊을 테니까.






<우주만 한 사연>

[우주]

우주와 비견될 만큼 큰 것은 없다. 그런 곳에 먼지 한 톨만 한 지구가 존재한다. 그렇게 작은 지구에 조차 비견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렇듯 사람들은 우주에 비하면 아주 작은 세포만도 못한 데 반해 각자의 마음에는 우주보다 큰 감정과 사연이 깃들어있다. 인간은 살아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깊은 내면 속부터 감당할 수 없는 행성들이 만들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조차 고통의 행성은 피해 갈 수 없다.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사람들>

[가족]

나 하나 건사하기 힘들다는 핑계로, 하루가 너무 바빠 미루고 또 미룬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멀어지며 후회는 켜켜이 쌓이고 한숨만 늘어간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리고, 따뜻하다. 고맙고, 미안하고, 항상 사랑한다. 무수히 많은 희망 중 가장 큰 희망은 단연코 가족이다.






<헤아림 위에 피는 위로라는 꽃>

[묵언]

언젠가 한 번은 꼭 묵언수행을 하려고 한다. 총 삼 단계로 나눠서 할 생각인데, 처음에는 딱 하루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며, 가게에서 밥을 먹을 때 하는 주문조차 말을 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단 한 마디도 뻐끔하지 않는 것을 성공한 다음 두 번째는 일주일 동안, 세 번째는 한 달 동안 입을 봉인한다. 모두 성공한다면 묵언수행에 대한 글을 쓰면서 복기하고, 무엇을 얻었나 깊이 고찰해보며 마무리한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한 결혼>

[결혼]

인생 최대의 고난이 아닐까 짐작한다. 과연 나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사람에게 재밌는 인생을 선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사라지지 않는다. 비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결혼을 하면 안 된다. 못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해선 안 되는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 스스로도 지치고 괴로운데, 타인은 더하면 더했지 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을 천천히 키워나간다. 일 년 전 보다 일 년 후가 더 사랑스럽고, 삼 년이 지나야 더 애틋해진다. 그렇게 사랑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하지 않게 되어 스스로의 성장판을 거세한다. 그러한 상태로 결혼까지 간다는 것은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재앙일 수밖에 없다.


굳이 긍정을 찾자면, 나는 배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과 우선순위가 일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는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정도인데, 이 또한 긍정이라 할 수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모의 흔적>

[성격]

마음속 깊은 곳에 냉혈보다는 온정이 가득했으면 했다. 그래서 얼어붙은 생각들을 녹이기 위해 치유에 관련된 도서를 마구잡이로 읽었다. 그럼에도 차가운 성격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누구에게나 온정을 베풀 수 없고, 아수라장 같은 참상에도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어떤 감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이러한 성격을 바꾸려고 수 백번 노력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아주 잠시 꾸밀 수는 있어도, 본질은 가릴 수 없었다.






<여행을 직업으로 삼은 녀석>

[여행]

2022년 6월 6일 나는 제주도에서 언어의 온도를 읽고 있다. 우연하게도 여행에 관련된 장에서 책을 덮었던 게 오히려 득이 되었다. 제주도에 도착해 카페 에오마르에서 처음 펼친 책 내용이 여행이라서 더 행복한 느낌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카페를 탐방하며 책을 읽을 생각인데, 크게 기대하진 않는다. 원래 계획은 틀어지기 마련이고 변수는 항상 존재하니까.


예상했던 것처럼 여행의 첫 시작인 비행기에서부터 난항을 겪었다. 기류가 안정적이지 않아서인지 도착시간이 지체되었고, 제주공항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버스는 40분 후에 도착했으며, 원래의 일정에서 두 시간이나 밀렸다. 예전의 나였다면, 계획대로 되지 않은 하루에 깊게 우울해하며 자조하기 시작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직도 아쉽긴 하지만, 슬프진 않다. 그저 '오히려 좋아.'라는 생각으로 오늘 하루도 힘차게 연소할 뿐이다.






<노력을 강요하는 폭력>

[미래]

당장 유명해지지 않아도 좋고, 살아생전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다. 빈말도 아니고, 가식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직업으로 삼는 데 최선을 다 할 테지만, 그렇지 못한 상태로 긴 시간을 지속한다고 해서 좌절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작가라는 꿈이 평생의 공상으로 남는다 해도 글 쓰는 행위에 정지를 가미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게 10년 30년 50년을 글 쓰는 데 몰두하면, 언젠가는, 누군가는 알아줄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이 살아생전이 아니라 해도, 100년 200년 후에도 어느 서가 구석에 박혀 있기만 해도 성공이다.






<솔로 감기 취약론>

[연애]

연애는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내성적이고, 예민하며 집에 있기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그들이 사회성, 그리고 사교성을 올바르고 따뜻하게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연애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던 스물다섯의 나는 사교성을 기르기 위해 독서 모임을 찾아 나섰다. 당연하게도, 그곳에서의 팔 할 이상의 사람들이 이상해 보였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책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독서모임을 찾아온 사람들이 이상했고, 독서 모임인데 책을 읽지 않고 오는 사람들이 한심했다. 이처럼 사람을 만나도, 모임에 참석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사회성에 스스로를 자조하며 하루를 허무하게 보내기 일쑤였다.


그렇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참석한 모임에서 우연히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그중 연인이 된 사람도 있었는데, 그에게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사람을 좋게 보는 방법과, 긍정적이게 생각하는 방도를 말이다. 그는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모임에 나오는 이유는 '그럼에도 읽기 위해서'라고 말했는데, 아마 본인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었다.


덕분에 사람을 배웠고, 사랑을 해봤다. 부정적이기만 했던 내게 긍정의 힘을 느끼게 해 줬고, 비관성이 짙은 내게 낙관의 중요성을 살포했다. 그렇게 과거와 미래가 합쳐진 현재의 주요함을 깨닫게 해 줬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데 연애는 필수 요건중 하나이다.






<분주함의 갈래>

[분주]

바쁨은 상대성이 짙고, 타인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운 말이라 딱히 선호하지 않는다. 한 번은 독서 모임에서 노션에 안건을 써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당시 너무 바빠 글을 쓰지 못했다고 변명한 적이 있다. 일의 특성상 차량으로 이동하는 일이 잦고, 앉아서 하는 일이 아니기에 휴대전화로 문자를 두들길 수가 없기도 했다. '운전을 하면서, 문자를 치는 것은 범죄가 아닌가.' 그렇기에 바빠서 할 수 없다고 했다.


이후 정확하게 말한 것은, 회의의 전과 후의 시간이 너무 소중해 그것에 시간을 할애하기 싫다고도 했다. 그도 그럴게, 회의 전에 노션에서 끝나지 않는 반문과 반론을 목격한 터라 "아, 이거 너무 하기 싫은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회의 후에는 "나까지 의제를 더했으면, 정말이지 끝도 없었겠다."라는 결론이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의제는 적게 결론은 빠르게 뱉어낼 생각이다. 모임은 나 좋자고 하는 것이지, 죽자고 하는 게 아니니 말이다.






<희극과 비극>

[독서]

예쁜 카페는 늘 그렇듯, 책 읽기 좋은 곳은 아니다. 내부와 외부 장식 모두 아름다우면서 독서하기도 좋은 카페는 드물고, 그것이 충족되는 곳은 대부분 북카페라는 명칭을 달고 있으며, 독립서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 이런 예쁜 카페에서 책 읽습니다!' 하며 괜찮은 사진을 건지기는 수월하지만, 의자가 낮고 식탁이 높거나 반대로 식탁이 낮고, 의자가 높은 경우가 다반사라 몇 시간 동안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


인스타그램으로 봤을 땐 분위기도 좋고 감각적인 곳에서 교양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상이 너무 높아 손목이 아프거나 상이 너무 낮아 머리를 지탱하는 목이 아프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우면서 독서하기 편한 곳을 찾았을 땐 세상 행복이 다 내게로 모여드는 것 같은 기분에 마냥 기쁘다.


때문에 나는 제주도까지 가서도 여러 카페를 돌며 힘겹게 글을 쓰고 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길>

[재능]

해야 하는 일에 재능까지 있다면 그것이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길이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 해도 재능이 있어 금전을 불러온다면 그것 또한 자신의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재능도 없고 금전적인 이득도 전무하다면, 그것은 오만이고 객기이다. 그럼에도 그 길만 보이고, 다른 길은 걷고 싶지 않다면 잇몸이 짓눌릴 때까지 악다물고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






<원래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질문]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똬리를 틀었을 때 비로소 나만의 길이 나타났다. 그 길은 넓디넓은 포장도로는 아니었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오솔길을 닮은 듯했다. 안온하지만 편하지만은 않은 그런 비포장 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러한 길을 선택했다. 그래야만 내가 더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고갈]

고통스럽고 느리게 흘러간 21년과는 다르게, 22년은 의식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달아났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나태함이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야속하게도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잘려나갔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다짐한 게 얼마 지나지 않아 무력함으로 변모되었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며 의미 없는 다독임을 내게 선사한다. 정말, 이 정도면 괜찮은 걸까. 아닐게 분명하고, 모자란 게 확실하다. 그럼에도 몸은 내 뜻과는 다르게 무너지고 있다. 막아 볼 방도 없이 축 늘어만 진다.






<더 주지 못해 미안해>

[사랑]

부모님의 사랑과 닮은 연애를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밖에서는 "나도 아직 그런 사랑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기 일쑤다. 이유는 민망하기도 하고, 입으로 아무리 떠든들 경험 없는 사람들에게는 위선으로만 보일게 뻔하니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가 없다.


내가 말하는 사랑이 그들에겐 '대가 없는 사랑'으로 보일 테고, 말 그대로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자식을 하염없이 사랑하는 부모들 조차 원하는 것은 있고, 대가를 바란다. 더 좋은 학교, 친구, 직장, 아내, 효도 등등 짐승이 아닌 사람에게는 무조건적인 모성애와 부성애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결국은 바라는 게 생긴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바르게만 커다오.' 또한 바람이고, 부모에 대한 자식의 최소한의 대가이다.


대가의 정도만 다를 뿐 나는 부모의 자식사랑과 닮은 사랑을 타인과 나눠본 경험이 있다. 닮았을 뿐 같은 것은 아니기에 헤어지긴 했지만, 서로를 저주하거나, 고래고래 소리치며 절연을 살포하지는 않았다. 부모 자식 간에도 인연을 끊는 경우가 허다한데, 아무리 가족과 같다고 해도, 남과 남인데 헤어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모와 자식을 연결하는 끈>

[심리]

사람에게는 남들이 감히 예측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 있다. 그것은 통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이 읽은 짧은 식견의 심리학으로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리고 우리들이 눈으로 본 선량한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무아지경의 상황에서는 자신의 부모도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고 도망가는 경우가 있다. 반면 누가 봐도 껄렁하고, 양아치라 말 해도 손색없는 인간 잡종이 전쟁의 영웅이 될 수도 있다. 그 처럼 사람을 책 한 두 권으로 양단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인데, 그들은 우리 곁에 있지도 않으며 더더욱 당신 일리 만무하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의 속내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애지 욕기생>

[사랑]

그런 사랑은 없다고 단정하기 전에, 스스로 나서서 그러한 사랑을 해보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그런'은 자신이 해보지 못한 사랑을 의미한다. 사랑은 누군가와 비교해서 절대적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자신에게만 빗대어야 한다. 사랑은 타인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의 토대는 온전한 자신에게서 나온다. 좋은 사람은, 자신이 좋은 사람일 때 나타나고, 좋은 사랑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눈앞에 현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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