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소풍, 영월]을 읽고 에세이

<23화> 작가 - 변선희

by 박진권




날마다 소풍, 영월
변선희

목차
1 ~ 20까지






1 [전진]

현재를 당면한 나는 늘 최대의 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지나면 별 일 아닌 일도 지금 당장은 아주 큰 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직면한 문제가 모두 작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위기가 평생의 문제 중 가장 큰 위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명확하게 인지된 불안의 위험도를 측정한다. 과거에 대입해보고, 미래를 가늠하며 유추한다. 그럼에도 별 일 아니라는 결과가 도출된다면 잠시 뒤로 넘겨놓고 다음을 기약하며, 전진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더 좋은 판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쳐둔 문제는 계속해서 상기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해결되지 않은 위험을 내면 속에 숨겨둔 채 평생을 잘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완전히 해소되지 않을 괴물을 안고서 발전까지 하지 않는다면, 그 자괴감은 절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우울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찝찝한 보류를 선택하는데 망설임은 사치다.






2 [변화]

새로운 시작을 위해 환경을 개선했다. 하지 않던 이로운 행동들을 통해서 스스로에 대한 정의를 다시금 확립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고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권태는 다시금 내 발 밑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권태는 나의 발과 손을 묶었으며, 자책은 눈을 가리고, 목을 조여왔다. 고문이 가미된 형장에서 벗어날 방법은 탈태였으나, 이미 한 번 과감하게 변했던 나는 그 행동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에 또 변화하는 게 두려웠다. 새로운 시작은, 현재의 끝과 같은 말로써, 지금의 나는 없어져야 한다. 새벽의 이슬과 같이 오늘의 해가 뜨면 완전히 증발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원래 없던 사람처럼 말이다.






3 [나는]

내 성격과 행동성 그리고 말투와 분위기는 사교성에 적합하지 않다. 나는 틀에 얽매이는 게 싫고, 누군가 나를 재단하는 것이 너무나도 역겹다. 그 비릿한 역겨운 냄새가 도저히 가시질 않는다.






4 [공상]

퇴근 후에 밀려오는 생각의 파도는 끊임없다. 대자연의 광포함은 작디작은 인간이 절대로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다. 그 생각들은 대부분 이렇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 맞는지, 옳고 그름은 어떤 기준에서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 그리고 어떻게 걸어야 더 행복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나아가며 꿈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색을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정상인가에 대한 고뇌로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5 [사랑]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받고, 주는 행위는 기적과도 같다. 평생을 다른 곳에서 서로 상이한 생각을 하며 살아온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걱정하며 또 미워한다. 그러다가 다시금 사랑을 살포한다. 그런 건강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내면은 단단하고도 아름답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기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행복의 굴레에 안전하게 안착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그 행복을 저버리지 말고, 평생을 간직하며 살았으면 한다.






6 [착각]

꿈을 내다 버린 채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내던 때가 있다. 그 무기력함에 온 몸을 내던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허무의 시기였다. 그런 시기를 잘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연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텅 빈 마음속에 그가 자리 잡자 공허는 충만으로 변모했다.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꿈을 내다 버린 채 충만하게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발전 없는 삶을 고대하며 말이다.






7 [긍정]

사치 때문에 남을 위해 짧은 하루를 빠르게 보내는 것보다, 사치를 줄이고 나를 위해 긴 하루를 느리게 음미하는 게 좋다. 물건을 얻기 위해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지옥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물건을 포기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멀리 하는 게 나에게는 더 이로운 삶일 것이 분명하다. 능력이 미미한 물질만능주의자에게는 절대로 행복이 깃들 수 없다. 그렇게 나에게 의미 없는 물질은 최소화하기로 했다.











8 [홀로]

아무리 독립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혼자는 쓸쓸하다. 대부분의 인간을 싫어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꺼려하는 개체도 쓸쓸함은 느낀다. 그게 평온한 고독인지, 사무치는 외로움인지는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겠지만, 무엇이 되었든 나 홀로 평생을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한 명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 한 명이 사라졌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고는 허무와 절망이 몰려왔다. 성인이라는 직책을 달고 사회생활을 하는 고등생물이기에, 고통을 감내하고, 우울을 인내해야 하며,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겐 죽어가는 티를 보내서는 안 된다. 마치 모두 회복된 것처럼 보여야 하고, 정상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안심할 수 있고, 안도하는 그들을 보며 나 또한 한 시름 놓을 수 있으니까.






9 [내성]

사랑에도 내성이 생긴다. 몸 안에 있는 연애 세포가 죽어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좋아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어렵사리 좋아하게 된 사람이 생긴다 해도, 결국에는 내가 원하는 만큼 그리고 그가 바라는 만큼의 사랑은 줄 수가 없다. 현재의 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한 발 빼는 게 습관이 되어 이별 후의 타격도 아예 없어졌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헤어진다는 것에 대한 내성이 생겨 더 이상 놀랍지 않고 큰 충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별할 때마다 매번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내성이 생기지 않는 사랑꾼만이 가능한 일이 분명하다.






10 [거듭]

굳어졌던 마음이 녹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30년째 딱딱하게 굳어 누구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살아왔다. 가족도, 친구도, 사랑도, 그 무엇 하나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다. 그들이 곁에 있을 땐 소중함을 망각하고, 멀어지면 그립다. 나는 최근까지 같이 살았던 조카들과 헤어지면서 마음에 큰 구멍이 하나 생겼다.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면 언제나 달려 나왔던 조카들이 보고 싶다. 어머니의 음식 냄새 그리고 함께 했던 식사 시간이 그립다. 그렇게 후회와 그리움이 점철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그토록 바라던 완전한 혼자가 된 것이다. 슬프면서도 기쁘고, 괴로우면서도 행복하다.






11 [반전]

하고 싶은 것은 당장 해야만 하는 성미를 가진 나는 괴롭다. 하나를 해도, 그다음을, 또 다음을, 다시 다음을, 매번 다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걷다가, 달리고, 정적인 쇠 운동과 정열적인 교차 운동을 병행한다. 거금을 들여 가구를 사고, 집을 꾸민다. 하고 또 하고 또 한다. 해야 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도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 모두를 진행하려 하고, 아직 못 해본 것마저 습득하려 한다. 하나도 완벽하게 하지 못하면서 다재다능을 말한다. 지금 하는 일도 잘하고 싶고, 다음에 할 일도 잘하고 싶은 나는 항상 피곤하다. 아직도 이렇게나 할 게 많다는 것이 너무도 괴로우면서 행복하다.






12 [느림]

귀에 기계를 끼우고 세상의 소리에서 멀어진다. 곧이어 흘러나오는 노래는 나의 걸음을 아주 느려지게 한다. 그렇게 느긋하게 풍경을 만끽하며 걷는다. 바쁜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빨라진 내 모든 신체들에게 사죄하듯 최대한 느리게 걷는다. 아무 할 일 없는 한량이 된 것처럼 유유히 말이다. 한가롭게 세상을 유영하며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느림은, 언제나 옳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잘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체로 너무 빨랐던 탓이다. 서두르면 될 일도 안되기에 기다리기로 했다. 아직도 무수하게 남은 기다림들이 익숙해지길 고대한다.






13 [우리]

우리라는 표현은 아무에게나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 온도가 명확하게 다르다. 완전한 타인으로서의 우리와, 온전하게 내 사람이 된 타자와의 우리는 궤를 달리한다. 내게 있어서 완벽한 타인에게 말하는 우리는 포괄적이며 편리성만 지대할 뿐이지만, 내 사람에게 던지는 우리는 단일적인 경우가 많으며 애정이 넘쳐난다. 내가 말하는 우리는 고난과 역경도 추억이 되며 이별마저도 따뜻한 그리움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내 사람을 우리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임이 분명하다.






14 [이름]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중 하나인 박 씨인데, 심지어 박 씨 중에서도 흔하디 흔한 밀양 박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름은 흔하지 않다. 물론 누가 봐도 특이한 이름은 아니지만, 특별하다. 30년을 살아가면서 같은 이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생소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흔한 박, 그리고 생소한 진권. 때문에 내 이름이 좋다. 마치 흔한 삼계탕인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토종닭으로 만든 삼계탕인 느낌이다.











15 [나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나를 나약하게 만든다. 지금 하는 일이 실패해도 어쨌든 돌아갈 공간과 사람이 있다는 것은 현재을 온전히 연소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과 절연을 하고, 공간을 배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무엇이든 최소한은 갖춰져야 사람답게 살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조금 더 몰아쳐도 되지 않을까 고민한다. 안온하고, 배가 부른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글에 매몰되고, 그림에 사장되어 하루하루를 예술을 하며 살려고 발버둥 쳤던 내가 아니다.






16 [소비]

아침을 거르고, 점심은 컵라면으로 넘기며 금전을 아낀다. 그렇게 하면 식대 또한 월급의 일부분이 되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간에 사용하는 돈은 일절 아끼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벽지 전체를 갈아엎는데 백만 단위의 금액을 일시불로 서슴없이 지불한다. 그리고 원하는 가구를 사는데 또 백만 단위의 금전을 쉽게 지출한다.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는 비용만 어림잡아도 이천만 원이 훌쩍 넘는데, 합리적이지도 않다. 내가 추구하는 집의 모양새는 옛날 느낌의 가구들과 가전들이고, 원목이다. 고전 풍 원목 가구의 가격은 절대로 실용적일 수가 없다. 효율적이지 못한 나의 소비관이 미래에 어떤 악재로 다가올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은 행복하다.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미리 그리며 하고 싶은 단 하나도 못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조금 덜 저축하더라도, 공간이 주는 평온함을 그대로 받으며 살고 싶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17 [여유]

느긋하게 천천히 걷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일정 수준의 돈을 모으면 시골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물론 그곳에서도 치열한 삶을 살아내겠지만, 도시의 삶과는 확실히 다를 게 분명하다.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게 행복한 나는, 고독해도 외롭진 않을 것이다. 장작을 패며 춤을 추고, 작은 텃밭을 가꾸며 노래를 할 것이다. 땀을 싸듯이 흘리며 마당을 꾸밀 것이고, 이 가구 저 가구에 긁히고 찍혀도, 웃으며 집 내부를 장식할 것이다. 그렇게 나만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행복하고 싶다.






18 [회피]

글 쓰는 게 힘들고 걱정이 될 때가 많다. 글을 평생 쓰겠다 다짐하고, 타자들에게 큰소리치며 알리는데, 마음 한편에는 다른 생각도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얼마나 더 쓸 수 있을까, 이 심정이 몇 년이나 지속될까. 원하는 꿈이 글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 확실한가, 내게 재능이 있나. 스스로의 글을 봤을 때의 심정은 당연히 행복하다. 내 글이 좋고, 재밌다. 타자의 재미와는 관계없이 글 쓰는 게 좋으니까, 평생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금전은 보장되어야 한다. 나만 재밌는 글은 금전적 가치가 낮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내 글을 선보일 때마다 재밌다는 평보다는 예술성에 관련된 평가가 줄을 지었다. 물론 예술성이 짙다는 평가는 내게 있어서 어떤 칭찬보다도 후한 칭찬이고, 그보다 나은 평가는 없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대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미흡하고, 재미없고, 불편한 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마음은 행복하지만, 입맛이 씁쓸한 글쓰기 인생을 살아갈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각오가 부족한 게 확실하다. 언제나처럼 또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9 [성장]

열등감을 먹을수록 성장하는 나를 마주한다. 열등감의 원인을 하나씩 해치울 때마다 타자의 말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의 맹렬한 감정에 휩싸인 채, 소신과 확신을 가지고 하던 일을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그토록 바라 왔던 문이 열렸고, 걸어야 할 길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 길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의 길이다. 꿈을 향해 걸어갈 긴 여정의 초입이자, 고통의 전초다. 나는 늘 그렇듯 힘내서 앞으로 나아갈 테고, 또 늘 그렇듯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는다. 노력이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세상에서 나태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자괴감에 짓눌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고민하며, 결론 내지 못한 채 터벅터벅 책상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는다. 그렇게 다시금 쓰기 시작한다.






20 [우주]

옅은 햇살에 정신이 들었지만, 눈은 떠지지 않는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구나를 인지했지만 다음 행동은 없다. 그저 햇살의 따뜻함을 만끽할 뿐이다. 그렇게 누워서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후 천천히 눈을 뜬다.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따스함에 서서히 기분이 좋아진다. 뜨겁지도, 따갑지도 않아 적절하게 행복하다. 이내 상체를 세우고 정면의 벽을 응시한다. 그저 잠에서 깨어났을 뿐인데, 행복하다는 감정이 샘솟는다. 그 감정을 고이 간직한 채 침대에서 탈출한다. 침실에서 나온 후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향한다. 청옥색 냉장고를 열어 원두를 꺼낸다. 원두를 적당량 덜어내 직접 갈기 시작한다. 드드득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이 주방을 가득 채운다. 원하는 입자의 크기로 갈아낸 후 기계를 이용해 에스프레소를 추출한다. 감성을 우선으로 구매한 녹색 에스프레소 기계의 성능은 처참하다. 그러나 예쁘다. 그렇게 에스프레소를 대략 250ml 정도로 길게 뽑아낸 후 얼음이 담긴 튼튼한 고블렛 잔으로 옮겨 담는다. 잔과 받침을 들고 거실 맞은편에 위치한 서재로 향한다. 서재 안에는 글 쓰는 책상과, 그림 그리는 책상이 따로 구비되어 있는데, 보통 글 쓰는 책상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열며 아침의 시작을 알린다. 사방이 볕이 잘 드는 집이라 그런지 어떤 공간으로 향해도 따스함이 나를 따라다닌다. 그렇게 다시금 행복한 하루가 시작된다. 나는 오늘도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나는 늘 그렇듯 행복하다. 혹여라도 내 글을 읽는 당신도 늘 행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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