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마야]를 읽고 에세이

25화

by 박진권



[지옥 속에 자리 잡은 작은 행복]

중학생 이전의 어릴 적 우리 집과 외가는 여름마다 계곡으로 놀러 가곤 했다. 계곡물이 흐르는 가장자리에 텐트를 치고 어른들은 분주히 먹을 것을 꺼내 준비했다. 물놀이를 하기도 전에 누나 둘과 나는 컵라면부터 각자 하나씩 흡입했다. 연료를 주입한 우리는 물이 고여서 놀기 좋게 형성된 계곡의 한 장소로 이동했다. 단숨에 뛰어들 것처럼 도달한 계곡물 앞에서 우리는 십분 정도를 머뭇거리며 앞다투어 외쳤다. "빨리 들어가 봐!"이 말의 뜻은 '물이 너무 차가워서 나는 아직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 아무나 먼저 들어가라!'였다. 그러다가 참다못한 누군가 먼저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먼저 들어간 누군가는 나머지 둘에게 들어오라며 물을 뿌려댔다. 엄청 차가운 물을 피해 도망가기도 하고, 복수하기 위해 물로 뛰어들어 같이 물장구를 쳐댔다. 그렇게 한참 물놀이가 재밌어질 즈음에 어른들이 다가와 고기를 먹으라며 우리를 불러냈다. 우리는 좀 더 놀고 싶었지만, 고기의 유혹보다 강한 것은 없었다. 우리는 정신없이 고기를 흡입했고, 또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먹고 놀고를 반복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니 어느새 해는 자취를 감추었고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지구의 천장이 언제 검은색이 될지 모를 때쯤 어른들은 우리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얘들 입술 파래진 거 봐. 빨리 나와서 옷 갈아입어. 집에 갈 거야." 아쉬움에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어린 나이에 오한이 스며드는 추위를 이겨낼 순 없었다. 우리는 물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이를 딱딱 부딪치며 온 몸을 덜덜 떨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텐트로 뛰어갔고, 빠르게 환복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던 아쉬움을 계곡에 두고 헤어졌다. 어둠 때문에 색이 바뀐 계곡의 모양새는 어쩐지 음산했다. 우리가 저곳에서 놀았던 게 맞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아버지의 익숙한 차 소리가 들려왔다. 차에서 내린 아버지의 미소에 싱숭생숭했던 모든 게 말끔히 사라졌다.


계곡으로 놀러 간 추억들 중 아버지와 함께한 기억은 많지 않다. 우리가 놀 수 있는 주말에도 아버지는 일을 하셨다. 아침 일찍부터 계곡을 들렀다 출근하셨고, 퇴근 후 늦은 밤까지 쉬지 못한 채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 그런 아버지는 고기 한 점 얻어먹는데도 핀잔을 들어야 했다. 한 번은 아버지가 내게 쌈을 싸 달라고 말씀하셨다. 곧이어 나는 상추에 깻잎을 덧대고 그 위에 고기 한 점을 올렸다. 그러자 아버지가 장난기 섞인 말투로 웃으며 말씀하셨다. "두 개는 올려야지~"이 말이 문제였을까. 친척 어른 중 누군가 그 말을 비꼬았고, 어린 나는 그 말에 주눅이 들었다. 우리 집 가장을 가벼이 여기는 행동에 내 존재 또한 점점 헐거워짐을 느꼈다.


물론 열 시간 동안 열심히 놀고먹은 추억은 행복하다. 그러나 내 아버지의 외로움을 짓밟았던 그 언사 때문에 행복한 추억이 크게 훼손되었다. 겨우 2분 정도의 짧은 모욕이 모든 것을 뒤엎는다. 지옥의 2분이 행복의 600분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싸준 쌈 한 점에 열 시간 동안 행복하게 일을 하고 우리를 마중 왔다. 지친 몸을 숨기고 미소 짓는 아버지의 잔상이, 아직도 선명하다.






[선택과 감내]

그림을 그릴 것 같은 사람. 운동을 잘할 것 같은 사람. 강해 보이는 사람. 나쁜 사람. 문신한 사람. 가벼운 사람. 작가가 꿈인 것이 비웃음을 유발하는 사람. 책을 좋아하는 게 이상하게 비치는 사람.


나의 겉모습을 보고 쉽게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렸을 땐 이것에 대해 부당하다며 목놓아 외쳤지만, 몇몇 타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네 선택이니, 사회적인 시선 또한 네가 감내해야 한다.'라는 의견이었다. 당시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이제는 그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누군가 나에게 "늙어서 후회하지 않겠어요?"라는 질문엔 "운동 안 해서 벌써부터 살이 처졌는데, 늙어서 후회하지 않겠어요?"라고 반문한다. 어떤 문제라도 타투에 귀결된 질문은 모두 반박할 수 있게 됐다. "아프지 않아요?", "아픈데 왜 해요?" 등 너무도 많이 받는 질문에 대해선 "아프죠.", "술 담배도 아플 텐데 왜 하겠어요."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 타투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적용해야 할 '선택'과'감내'가 존재한다. 날 때부터 못생긴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해도 노력으로 나아질 수 있다. 피부를 관리하고, 자신에게 맞는 머리 모양새를 찾기만 해도 매력은 생긴다. 또는 괜찮은 옷을 입거나 성격이 좋아진다면, 더욱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못 생겼어도,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은 즐비하다. 그럼에서 못생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꾸미는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뚱뚱하거나, 마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본인의 선택이다. 특정한 병을 제외하고는 절대 살이 찌지 않거나, 절대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자신은 물만 먹어도 살이 찌고, 아무리 먹어도 찌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서 빨리 병원으로 달려가 정밀검진을 받아보길 권유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사'에서 해부실험을 당할 테니까. 스스로를 관리하는 게 귀찮아서 방치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외모지상주의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타투와 관계없이 사람이라면 사회적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이 선택한 것은 불평할 게 아니라, 감내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사람은 알 수 없다.]

무엇이든 꼭 해석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해석하는 것이 비단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기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게 더 편했을 테니까. 그러나 해석이라는 것은 저마다 큰 차이가 존재한다. 같은 책을 보더라도, 다르게 해석하는 것처럼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책과 영화 그리고 드라마도 그럴진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개체마다 샐 수 없이 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감히 개인이 타자를 해석할 수 없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해석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두부류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박사이거나, 편협함의 극치를 달리며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에만 빗대어 판단하는 피해의식에 찌든 멍청한 사람이거나.






[주체적인 사람]

나는 꼭 좋은 사람이고 싶진 않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기준이 모호하다. 같은 행동을 해도, 내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에 대한 평가를 신용하지 않는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상 사람은 그냥 사람으로 본다. 그렇기에 나도 그냥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굳이 좋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은 스스로의 자신감을 억누른다. 상대방을 배려해야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든 본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아무리 숨기고, 발악을 해도 관계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모두 불일치한데, 계속해서 억지로 일치시키려 가면을 쓰는 행위는 자신의 자아를 좀먹는 행동이다.


때문에 나는 그저 나로 살아간다. 그저 나로 살아간다는 말은 거창한 게 아니다. 나만의 길을 잘 걷다가 남들의 말에 잠시 휘청일 수도 있다. 참지 않고 행동하다가, 어느 날은 좀 더 참아볼 수도 있다. 무시하고 넘어가는 게 일상이다가도 오늘은 지적을 해볼 수도 있다. 이처럼 그냥 변덕이 죽 끓듯한 나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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