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흔적을 좇는다. 사람들과의 좋았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뒤로 바싹 다가간다. 반대로 싫었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잡아채기도 한다. 그것들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지도 못한 채 속박하기도 한다. 미래를 알 수 없고, 앞으로 남을 사람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유추하고 경계한다.
[여름의 빌라]
'오늘도 아침 해가 밝았고, 내일도 아침 해는 밝을 것이다.'
맥락 없는 저 문장을 보고도 많은 사람들이 좋은 생각을 내게 들려주었다. '매번 똑같은 일상의 단조로움이 느껴진다.', '아무리 부정적인 상황이라도 늘 긍정은 나타난다.' 등등 여러 가지 해석이 난무했다. 내게는 그것만큼 값진 것이 없다.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려는 작가가 있는 반면. 한강 작가님처럼 '학살'이라는 주제 하나로 '협소하지만, 집중된 내면'을 보여주는 작가가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단지 '협소'하다고 일축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깊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방대한 지식을 뽐내는 작가도 좋고, 한강 작가처럼 방대한 지식을 뽐내진 않지만, 충분히 사색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작가도 좋다.
'집필은 찰나의 영감이 아닌 끊임없는 노동이다.' -스티븐 킹
앞으로도 많은 경험을 하겠지만,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나'에게 더 집중하고 싶다. 구심점도 없이 태풍 안의 비닐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싶지 않다. 오랫동안 앉아서 긴 시간을 소비하며 글 쓰는 게 좋다. 멍청하게 무엇이든 경험하겠다며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열여덟 때부터 뛰어든 사회 속에서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온실 속 화초들이 하는 개소리 걸러 듣기'였다. 그들은 집에 빨간딱지가 붙어 본 기억도, 소중한 사람들이 줄지어 죽어나간 경험도, 어떤 고통에 몸부림치며 난간 위에 발을 걸쳐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사람의 내면은 우주보다 크다. 그것을 끌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쏟아내도,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글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좁은 시야는 협소함을 자아낸다.'
[고요한 사건]
어릴 적 자주 갔던 친구의 집과 딱 한 번만 가본 친구의 집은 내게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집 다 불편함이 동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의 집도 내겐 그저 친한 사람이 속해 있는 불편한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남의 집에 가는 것을 꺼려한다. 반면에 내 집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너무도 편안하다. 내 공간에 누군가 허락 없이 들어오는 것은 극도로 싫어하지만, 직접 초대하는 것은 선호한다. 그들이 내 공간을 칭찬하고, 좋아하고, 편안해하면 너무도 뿌듯하다.
온전한 내 공간에서 온건한 내 사람과 하는 담화는 시간을 순식간에 녹여 없앤다. 순간순간이 아쉬워 5분이라도 더 붙잡게 된다. 조금이라도 더 그 행복을 유영하기 위해서 말이다.
[폭설]
우리 가족은 대체로 화목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또 누나까지 모두 이타적인 사람들이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건설 사업을 하셨다. 당시의 어떤 국회의원의 집을 지어주고 대금을 받지 못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인부들에게 월급을 주었고, 자신은 도산했다. 때문에 우리 집은 논밭이 즐비한 동네로 이사를 갔고, 네 식구가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은 단 3평 정도였다.
어머니와 누나 또한 남에게 악한 일은 절대로 상상도 행동도 못할 위인들이다. 타인의 고통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배고픈 사람에게 공짜로 밥을 줄 수 있는 선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타인은 완전하게 배제할 수 있는 나와는 달리 여린 사람들이다. 때문에 환경은 그 사람의 겉모습을 변형시킬 순 있어도 깊은 내면 속 성질을 좌우할 수는 없다.
누나와 나는 완전하게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 우리는 바쁜 부모님 때문에 늘 어려운 어른들 곁에서 눈치를 보며 지냈다. 한 살 터울이라 생각의 깊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도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람 고유의 성질이 무조건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진 않는다는 소리다. 나는 해야 할 말도 절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지 말아야 할 단어도 쉽게 내뱉는 사람이 됐다. 여덟 살 때부터 스무 살까지 18년 동안 눈치만 보며 살던 내가 이제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타자의 관심을 완전히 배제하는데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에 대한 뒷말을 하는 것조차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하니 화도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누나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쓴다. 집안의 금전을 모두 관리하고, 아이가 둘이 된 슈퍼우먼인 누나는 변함없이 종업원조차 잘 부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환경이 어쩌고 한다면, 나도 더 이상은 방도가 없다. 세상 사람 모두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고, 스스로의 시선에 보이는 게 전부일 텐데 감히 누구를 판단하겠나. 어디서 감히 같잖게 타인의 생각이 좁고 편협하다 말할 수 있겠나.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사랑 없이 서로를 기만하며 한 공간에서 사는 것이 두려워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결혼 유경험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사람이면 결혼해도 되겠다' 할 때 그 순간을 조심하라고 한다. 그리고 아내가 친정에 갈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몇몇 유부남들은 술자리에서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서 이렇게 내뱉는다. "내 이상형은, 처음 보는 여자야~!" 그리고 남녀 할 것 없이 쉽게 외도를 하고, 이혼을 한다. 정신적, 시간적, 금전적으로 모두 손해인 결혼을 꼭 해야만 할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흑설탕 캔디]
쇼펜하우어처럼 사랑을 섹스로만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적 흥분만이 사랑이며 유통기한은 3년 언저리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패배자들이다. 그들은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 섹스도 잘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미친 듯이 하고 싶은 욕망은 내면에서부터 증폭이 되어가니 다른 사랑들을 매도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순수한 사랑을 목격할 때마다 온몸에 개미가 들끓는듯한 느낌을 받으니,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사랑은 섹스가 전부다!'라고 앵무새처럼 외치기만 할 뿐이다. 사랑은 딱 한 가지로 정의 내릴 수 없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성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연인과 부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연인은 섹스가 전부고, 사랑은 섹스의 산물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역겨운 선민사상을 필두로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타인들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이유를 통달했다고 착각한다. 자의로 하지 않는 것과, 타의로 하지 못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데 말이다.
[아주 잠깐 동안에]
후각이 예민한 나는 강렬한 냄새보다 은은하게 오래가는 향기를 선호한다. 남들보다 유독 후각이 예민한 탓에 '은은한 향수'라고 하는 것들의 냄새도 역할 때가 있고, 두통까지 밀려온다. 그렇기에 은은한 향을 머금은 것들을 좋아한다. 그것은 향수도, 섬유유연제도, 탈취제 그리고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는 향으로 사람을 판별할 때가 종종 있다. 대단히 편협하고, 미신적인 행태지만, 그 사람에게 어떤 냄새가 나는가에 따라서 호감도가 결정된다. 나와 잘 맞는 사람에게서 나는 향과, 평생 어울릴 수 없는 사람에게서 풍겨오는 냄새가 구분되어 있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면 좋은 사람이 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무리 같은 향수를 뿌려도 그 사람 고유의 냄새 때문에 발향 후 그 내음이 달라진다. 때문에 설령 같은 향을 뿌린다 해도 호감과 비호감의 차이는 확연하게 구별이 된다.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사소한 행동이 그 사람의 격을 만든다. 가령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비누로 손을 닦는지, 물로만 손을 닦는지, 혹은 아예 손을 닦지 않는지에 따라서 부류가 나뉘기도 한다. 비슷한 환경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위생이나 취향 언어 사용 그리고 냄새마저 그만그만하다. 청결을 유지하지 않고, 욕을 내뱉으며 취향이 더럽고 냄새도 고약한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키와 상관없이 가분수처럼 뚱뚱하며 술과 담배를 즐기고 옆구리에는 클러치백을 끼워두고, 팔자걸음을 하며 짝퉁 명품을 몸에 걸친다. 그것들을 보며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아, 인생 별거 없구나. 저들이 하는 행동을 반대로만 하면 저열한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있겠네!' 그러니까, 청결을 유지하고 운동을 하며 체형과 체중을 관리한다. 그리고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며 욕을 삼가고 취향을 더럽지 않게, 냄새는 향기롭게 유지하면 적어도 실패는 하지 않을 테다.
[해설 - 황예인, 나의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서]
서로 간의 오해는 이해로 이겨내고, 혐오는 사랑으로 변모할 수 있다. 컴컴하고 축축한 방에 홀로 남겨진 듯 불쾌하고 고통스러울 때 사랑은 빛을 발한다. 이 쓸쓸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사랑까지 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던지는 것과 같다. 언제나 긍정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랑은 항상 옳다.
[작가의 말]
2022년 11월 21일(월요일)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엄마가 갑상선 수치 때문에 쓰러지셨어. 살도 많이 빠지셨고, 몸의 떨림이 멎지를 않으셔. 정밀검사 후에 약물 치료 또는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하네."
"치료는 되는 거야?"
"아마 완치는 안되고,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할 것 같아. 원래도 안 좋았어서."
텅 빈 집에서 혼자 자조하며 넋을 놓고 있었다. 뭐라도 하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집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머릿속이 너무도 시끄러웠다. 일단 나가야 했다. 밖으로 나가 운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운동을 해도 상념이 끊이질 않았다. 횟수를 세지 못하고 멍청하게 반복 동작을 수행했다. 몸통에 힘이 풀리고 근육에 경련이 왔을 때 비로소 행동을 멈출 수 있었다. 그렇게 현기증이 느껴지고, 손 발이 떨릴 때쯤 헬스장에서 벗어났다.
다시금 텅 빈 집으로 돌아왔다. 적막함을 밀어내고 빠르게 샤워를 했다. 물기만 닦고 헐벗은 채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다가오는 아들(고양이)도 밀어냈다. 완전한 혼자, 완연한 적막이 완성됐다. 짙은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생각을 했다. 여러 가지의 잡념이 우후죽순 밀려왔다. 그렇게 아침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