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을 읽고 에세이 1부

28화

by 박진권



[1. 1988년생]

[절단]

지워지지 않는 상념은 뿌리칠 방도가 없다. 때문에 아예 깊게 파고들어 본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세상 참 어렵다'라는 결론이 나올 때가 있다. 결론이 나왔다고 해서 생각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늘 다음 고민이 찾아왔고, 숨 쉴 틈 없이 계속해서 생각의 파도가 밀려왔다. 그 생각은 늘 열린 결말로서 사람을 미친 듯이 상상하게 만든다. 그 생각의 종착지가 어디일지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지만, 걱정은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끄러워진 머릿속을 이고 서재로 향한다. 서재엔 내가 좋아하는 것들 투성이라 조금은 안정된다. 그렇게 책을 살피고, 그림을 그리고, 독서를 한다. 비로소 쓸데없는 생각과 관계들이 떠오르고 정리된다. 어떤 것을 먼저 지켜야 하는지 명확해진다. 그렇게 쓸데없는 것들을 유지 보수하는 데 들어간 내 힘을 회수한다.






[2. 그 외침]

[예술]

예술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예술의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닌, 내가 하고자 하는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무지다. 무엇이 바탕이 되어 어떤 작품을 토해내고 싶은지 기준이 모호하다. 깊은 고심 끝에 '나의 정체성은 이것이다!'라고 적확하게 명명한 적이 없다. 하고 싶은 것은 평생 글을 쓰다 죽는 것이고, 쓰고 싶을 글은 소설이다. 소설의 주제는 개인이며, 그것은 '나'로 함축되어 있다. 때문에 이것이 예술인가라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뱉어낼 수 있는 문장이 없다. 내 글이 예술이라면, 편견의 극치를 달리는 사람들의 외침도, 일기도 예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 예술은 무엇일까.






[3. 정진 씨, 내 절친]

[절연]

내게 있어서 우울은 긍정이었고, 불안은 삶의 토대였다. 우울할 때 미친 듯이 썼고, 불안할 때 계속해서 성장했다. 그렇지만 삶의 안정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만족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나는 외딴섬의 무적자이자 독거였다. 누구의 눈도 바라보지 않았고, 손도 잡지 않았다. 겨우 맞췄던 눈은 쉽게 피했고, 잡았던 손을 어렵지 않게 놓았다. 손의 경도가 그리고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이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다시 혼자이길 갈망했다. 계속해서 옆에 사람들이 다가왔고, 나는 밀어냈다. 글을 쓰기 위해 인간을 만나고, 더 잘 쓰기 위해 그들을 밀어냈다. 그 고난의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4. 최소한의 노동자]

[동전]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을 마주하는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늘 어렵다.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듣기 좋은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뒤에선 전혀 다른 자세로 상대를 모욕한다. 웃는 얼굴로 뒤에선 독사 같은 혀를 날름거리는 그들이 역겹다.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벌어지는 그 아가리의 틈에서 역한 냄새가 흘러나온다.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밀려온다.






[5. 의자들]

[의미]

만나서 손을 잡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걷는다. 별 의미 없는 행동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감촉의 손을 잡는다. 생존 때문에 먹었던 음식물이 산해진미가 되었다. 그저 잠을 깨우려 마셨던 차가 세계 최고의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에스프레소로 변모한다. 그리고 매번 걷던 그저 그런 거리가 지워지고 해가 질 무렵 파리의 거리가 되어 가슴속에 크게 각인되어 쉽게 잊히지 않을 준비를 한다. 놓고 싶지 않고, 잃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되어 내 앞에 실제로 현현한다.






[6. 전복, 균열 혹은 놀이]

[관계]

30년의 짧은 인생 동안에 진심으로 내 꿈을 응원해주는 이는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말할 때 반짝이는 내 눈과 그들의 눈이 마주쳤을 때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근심, 걱정, 당황 그리고 한심스러움. 나의 글쓰기는 '돈'이 되지 않는 일이고, 현대에서 말하는 성공과는 거리감이 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공감과, 격려를 받아본 적이 없다.


내 이상향이자, 이상형은 나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사람이었다. 어떤 갖가지 이유를 붙이지 않고, 단순하게 글쓰기 자체를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가상세계의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안위와 이득을 바라지 않고 한 사람을 진심으로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은 80억 인구 중 1천만 명도 채 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내 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여러 사족을 붙이는 사람들과는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나를 온전히 믿어준 한 사람조차 밀어냈다. 그런데 나를 의심하는 타자들과 떨칠 수 없는 관계로 발전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7. 불빛을 보았네]

[우리]

'우리'라는 말을 잘 쓰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나와 타인을 하나로 묶는 행위고, 그것은 엄청난 친밀감이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우리'라고 할 땐 그만한 호감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간혹 "나는 그냥 습관적으로 우리라고 하는데?"라고 하는 인간은 자신이 부정적이게 생각하는 타인에겐 절대로 '우리'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정확하게 각각 나누어 자신과 그들을 분리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우리'라는 말을 쉽게 내뱉을까. 답은 간단하다. 싫은 사람에게는 '우리'를 사용하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우리'를 사용한다. 즉 주변에 호감을 두는 상대가 많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별별 사람도 전부 '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 감정이 헤픈 사람이 내뱉는 '우리'와 내가 내뱉는 '우리'는 질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그들은 '우리'라는 집의 문을 항시 개방하지만, 나는 늘 굳게 닫아놓고 자물쇠까지 걸어 잠그기 때문이다.


나는 '헤픈 우리'속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한다. '깊은 우리'를 아는 사람만을 열렬히 환영한다. 때문에 지금은 나의 '우리'가 헤픈지, 깊은지를 판단할 때이다. 그동안 낮은 담장으로 인해 쉽게 들어온 '헤픈 우리'들을 몰아내고 다시금 '깊은 우리'만을 남겨둘 생각이다.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는 '우리'들을 만들어야만 한다.






[8. 잿더미 위에서 춤을]

[같이]

같이 무언가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혼자 해야 더 효율적인 일을 굳이 같이 하고 싶은 이유는 한 가지다.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때때로 같이는 비효율적이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부정의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이라는 부사가 내게 주는 긍정이 그 부정을 덮는다. 때문에 계속해서 미래에 같이를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같이는 늘 소수의 영역이었다. 하나 보다는 둘이 좋은 것은 맞지만, 둘을 초과한 셋은 썩 내키지 않았다. 이후 넷, 다섯, 여섯은 내 기력만 앗아갈 뿐 긍정은 없었다. 그렇지만, 예의 그렇듯 늘 둘이 좋은 것은 아니다. 가끔씩 그 둘을 바꾸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한다. 같이 가 싫어지기도 하고, 혼자를 열렬히 갈망하기도 한다. 그것이 내 본연의 독립성인지, 고독성인지는 알 길이 없다. 막상 혼자가 되면 다시금 둘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를 그리지 않는 모든 관계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한다. 혹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래야만 한다. 어떤 관계에서 긍정보다 부정이 높아질 땐 이미 벗어날 시기를 놓쳤을 때가 다반사였다. 다시금 그러한 일을 겪을 이유를 부단히 찾았으나 당연하게도 타당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좁아진 시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답은 한 가지뿐이다.






[9. 어떤 엄마, 어떤 아빠]

[음주]

음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 숨기곤 한다. 예를 들면, 음주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그것의 분위기를 즐긴다고 말이다. 술은 수단일 뿐 크게 좌우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그 좋은 사람들 가운데 술이 빠지면 갑자기 좋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


회사 회식을 자주 참석하는 사람들은 사회생활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보다 직급이 높고, 능력이 출중하며, 멀쩡이 대인관계를 잘하는 사람들 중 회식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널렸다. 단 한마디 "술 할 줄 모릅니다"로 변변찮은 회식자리에 자주 참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회식은 코로나 덕분에 사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회식이 사회생활의 연장선이라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그저, 술을 마시고 싶은 알코올 의존증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술을 먹고 취했다는 것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알딸딸한 거지 취한 건 아니야"라는 말을 내뱉은 순간 취했음을 직감하는 게 옳다.


강력 범죄는(살인, 강간 등) 대체로 빛이 없는 밤 그리고 으슥한 곳에서 발생한다. 범죄자들의 제1순위 타깃은 신체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사람이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 그리고, 귀에 이어폰을 낀 상태로 비틀거리는 사람이다. 심지어 근래의 대부분의 강력 범죄는 CCTV앞에서 일어났다. 더욱이 범죄자들은 구속된 직후 자신의 혈중 알코올 농도에 대해서 외치며 스스로를 변호한다.






[10. 첫 번째 반격]

[수긍]

무관심은 별거 아니다. 시큰둥한 반응과 더불어 그럴듯한 말을 내뱉으며 스스로를 변호하면 대부분 수긍한다. 그게 엄청난 무관심의 극치인 줄 모르고 사람들을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는 상대에게 관심이 짙을수록 조율을 하려 한다. 반대로 관심이 옅어질수록 수긍한다. 그래도에서, 도를 뺀 나머지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래, 그래.


그렇게 해.






[11. 정반대의 명제들]

[얼음]

때때로 냉소가 찾아온다. 머릿속에선 빙하기의 선사시대가 그려지고, 호수가 얼 정도의 추운 겨울 동네가 떠오른다. 그 냉소는 미래를 유추하고, 외롭지만 부유한 형상을 나타낸다. 그곳에서의 나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나, 예의 그렇듯 아마도 완전히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변모할까.


스무 살 초에 김동인 소설가의 광화사와 광염소나타를 읽었다. 그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범죄를 저질렀고, 극단의 상황에서 광인으로 변모했다. 광염소나타의 주인공은 불타오르는 집을 보아야만 피아노라는 예술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멀쩡한 가정집을 불태웠다. 광화사의 주인공은 미인도를 그리기 위해 멀쩡한 소녀를 죽음으로 인도했다.


나는 그 소설들을 읽으며, '대체 왜 저렇게 까지 할까.'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답은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서른 살이 된 지금도 적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열망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 분야에 미칠 정도로 몰두해야 성공의 말석이라도 차지할 텐데, 그렇게 미치긴 죽도록 어렵다. 그렇다면 미칠 수 있는 계기가 나타나길 갈망하지 않을까. 혼자 미칠 수 없으니까 누군가의 도움이라도 받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광염소나타에선 방화였고, 광화사에선 살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어떤 예술적 계기가 필요할까. 바로 냉소와 고독 그리고 단절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예술적 계기가 역겨운 범죄행위가 아니라서 말이다.






[12. 늙은 시민]

[독거]

남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려 한다. 그들이 봤을 땐 다른 길이 아닌, 틀린 길이다 싶은 궤도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곳으로 향하고 싶은 이유는 결국 혼자가 좋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외로운 까닭은,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비슷한 류의 혼자를 찾고 싶다는 허영 때문이 아닐까.






1. 브런치 에세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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