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편의점 2]를 읽고 에세이

<24화>

by 박진권



[휴식]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낸다. 내게 있어서 집은 작업실이자, 휴게 공간이다. 공간의 분리를 좋아하는 나는 글 쓰는 책상에서는 글만 쓰고, 그림 그리는 책상에서는 그림만 그리는 것을 선호한다. 때문에 집에 앉을 수 있는 상만 여섯 개나 된다. 당연하게도 침대 위에서는 잠만을 청하는 게 가장 좋다. 굳이 침실에서 무엇을 하겠다면, 침대에 누워 나태함을 선보이지 않고 옆에 있는 책상에 앉아서 행동한다. 그래야만 게을러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의 분리, 행동의 분리는 성실함으로 연결된다고 믿기에 이로운 강박을 떨쳐낼 수 없다.


그리고, 집 안의 주광색 조명은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는다. 집에는 여덟 개의 조명이 있는데, 그중 엄청 밝은 전구색 조명 두 개를 주로 사용하는 편이다. 조명 하나 때문에 집안 전체가 삭막해 보일 수도 따뜻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부터는 주광색 조명보다는 전구색을 애용하게 됐다. 혼자 있는 집에서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사람]

호구가 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의미 없는 손해를 멀리 하고 싶었다. 나는 늘 작은 손해에도 이유가 있었고, 얻는 것이 있었다. 사실상 손해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만난 후 나는 꼭 손해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쳤다. 계산 없는 행동은 나 자신을 해금했다. 그 사람의 부드러운 말투와 과장 없는 행동에 감화되어 절대로 손해를 입어선 안된다는 굳은 신념이 순두부처럼 부드러워졌고, 고무처럼 유연해졌다. 가끔씩 손해를 보더라도 털털하게 웃으며 넘기고 다음을 대처하는 사람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것을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목격하다 보니 내게 있어서 모든 행동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어떤 제약이 옅어졌다. 이렇게 하면 안 돼, 저것도 불필요해 등 모종의 이유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내가, 이럴 수도, 그럴 수도 있지, 일단 해보자 하며 행동하는 사람이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은인 덕분에 좋은 사람들이 나타났고, 괜찮은 상황들이 즐비했다. 나는 그저 가끔씩 손해를 감수했을 뿐인데, 오히려 괜찮은 그림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생겼다. 무조건 손해를 기피할 이유가 없어졌다.






[괴물]

악한 속내가 훤히 보이는 괴물들은 멀리하고 싶다. 그런 인간들은 대부분 용기가 없어, 척을 잘한다. 아닌 척, 착한 척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부류들이다. 심지어 피해망상도 있어, 사람의 말을 왜곡해서 듣는다. 싫다는 의사 표현에는 좋은데 부끄러워서 거절한다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좋다는 말은, 싫은데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좋게 포장한다고 곡해한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어떤 말도 소용이 없다. 그들의 기분에 따라 좋은 말도 나쁜 뜻으로 또 나쁜 말은 좋을 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 괴물들에겐 논리적인 대화 또는 설득이 의미가 없다. 그럴 시간에, 스스로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에 집중하고 좋은 사람을 찾아 나서는 게 훨씬 현명한 판단이다.






[작가]

글 쓰는 일은 내가 잘하는 일이자, 꿈이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반듯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 직업이 되고, 잘하는 일이 꿈인데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타자가 뭐라 하든 나는 글 쓰는 게 즐겁다. 작가가 꿈이고, 언젠간 분명 작가가 될 것이다. 아니, 나는 이미 작가라고 생각한다. 긴 인생을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글을 쓰게 될지 고대하는 사람이 작가가 아니면 무엇일까.






[허점]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이 전염병이 삼 년이나 지속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백신이 만들어지고, 일차 접종을 했고, 이차 이야기가 나올 때쯤 이제는 정말 끝나겠구나 생각했다. 백신이라고 불리는 약을 두 번이나 맞았고, 따라오는 부작용도 이겨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몸도 코로나를 이겨낼 때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육 개월 후 나는 삼차 접종을 완료했다. 이번에는 부작용도 없었다. 열 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육 개월 후 이제는 사차 접종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몇 년 후 코로나에 대한 글을 쓸 때쯤이면 사십 차 접종에 대한 고찰이 아닐까 싶다.


삼차 접종 이후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화가 종료되었다. 이제 밖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영업시간 제한도 사라졌다. 이십사 시간 운영하는 가게들은 밤새 불을 켜 둘 수 있게 되었고, 이십이 시 이후 영업 제한에 걸려 힘들어하던 술집 사장님들 또한 숨통이 트였다. 제한에 억눌려 있던 사람들 또한 차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코로나는 그대로 기승이고, 언제 다시 제한이라는 독이 한국에 퍼질지 알 수 없다. 또다시 억압이 한국을 덮친다면 사람들은 이 재앙을 어떻게 버텨낼까.






[동맹]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자주 망각한다. 서로 덕담을 나눠도, 부끄럽지 않을 사이의 내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다. 그들은 모두에게 일관된 평판으로 삶을 영위한다.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남을 험담하지 않고,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다. 타자를 깎아내리지도 않고, 사람을 혐오하지 않는다. 이타적인 행동이 기저에 깔려 있으나, 누구에게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을 자주 잊으며, 때때로 고독 속에 파묻힌다. 내 편은 언제나 주변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해야 한다.






[작문]

산문에 대한 벽은 넘어섰으니, 이제는 소설이다. 나는 항상 소설 쪽에 더 큰 마음이 쏠려 있었으나,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글을 쓰다가 포기하는 게 일상이 되었고, 완성된 글의 투고를 미뤘다. 내가 쓴 글에 자신이 없었다. 자신감이 내 안에서 결여된 것인지, 다른 사람과의 비교 때문에 사라진 것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불편한 편의점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적확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었다. 걱정은 독이자, 비교는 암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래전부터 걱정은 쓸데없고, 비교 또한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만 있는 정도였다. 걱정을 하지 않고, 비교를 멀리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고, 실행 방법 또한 구체적이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대단한 작가 들과 비교하기 바빴고,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아마 앞으로도 종종 비교하고, 걱정할 것이나 이제는 조금 다르다. 걱정은 독이고, 비교는 암이다 라는 글을 집안 곳곳에 적어 붙여 놓고 매번 상기할 테니까.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소멸시키고,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으며 나만의 글을 쓸 것이다.






[첨언]

근래에 생각이 참 많다. 여러 사람의 조언은 분명 피가 되고 살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의구심이 따라오는 것은 왜일까. 나는 늘 걱정이라는 말로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격을 탐색한다. 작가에게는 독자가 필수적으로 따라붙는다. 독자의 지식수준이 어떻든 그들의 평가에 작가의 평판이 결정된다. 그런데, 책을 많이 읽지 않는 독자의 평가도 순순히 받아야 할까? 애초에 여러 소설을 읽어 보지도 않은 사람의 말이 소설가에게 필요한 독자의 의견이라고 볼 수 있나. 모든 것에는 분야가 있고 그것은 생각보다 세분화되어 있다. 따라서 글쓰기에도 여러 가지의 장르가 존재한다. 에세이, 산문, 소설, 자기 계발서 등 모두 다른 분야고, 이 분야를 전부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 가지의 글쓰기라며 쉽게 재단하는 게 옳은 생각일까. 각자 하는 일이 상이한 회사원들에게 똑같은 월급쟁이라고 폄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심지어 소설에도 현대소설이 있고, 인터넷 소설이 있다. 뭐가 더 대단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저 각 분야에는 도저히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글쓰기에 목숨을 건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자신의 직업에 인생을 건 사람이 있고, 그저 돈만 받으러 다니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인 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