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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어둠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헤르만 헤세_데미안

by 박진권

데미안



헤르만 헤세



니케북스




흑과 백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은 대체로 악으로 치부된다. 오히려 회색분자라는 칭호와 함께 더 큰 악으로 명명되기도 한다. 한쪽을 선택하지 않고 ‘간’을 본다고 넘겨짚으며 ‘박쥐’라고 비난한다. 극과 극이 얼마나 밀접하며, 얼마나 유사한지 모른 채 말이다. 내 눈에 그들은 데칼코마니와 다름없다.


한쪽으로만 치우친 사고를 하고,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즉시 악으로 치부하는 것.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의 ‘죄’는 눈감고, 귀 막는 행태.

마지막으로 타 진영의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 오만함까지.


이상향이 다른 ‘타자’를 인식하지 못 한다. 싱클레어의 생각처럼 요즘 사람들은 사람이 무엇인지 모른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아예 다르게 곡해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철학은 오롯이 일방향이고, 세상은 자신의 위성일 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배척과 포용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로 정립하기엔 너무도 모호하고, 무지한 단어다. 죄인에게 사회적 합의에 맞는 형벌만 내리고, 그것에 그쳐야 하는 것을 정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비질란테는 어떠한가? 당연히 법치주의에서는 결이 다르나 결국 ‘범죄자’임에는 매한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자경단에게 ‘악’이라고 한다거나, ‘정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회색 주의에도 허점은 많다. 파고들고, 헤치려고 했을 때 민낯이 조금도 벗겨지지 않을 사상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정의 하나도 제대로 타협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개인과 만인의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인터넷을 넘어 인공지능 시대에서 앎이란 그 효용 가치를 잃었다. 타인의 논리도 그저 복사 붙여넣기로 편하게 반박하기 때문이다. AI가 얼마나 헛소리를 자주 하고, 오물을 뱉어내는지 알지 못하기에 벌어지는 사태다. 심지어,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정도의 지식도 전무하다.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의 대화에서 개인의 철학이 정립되지 않는 이유가 나온다.


“보아하니 너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걸 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 같아. 그렇다면 너는 생각한 것을 온전히 삶으로 실천하지는 못하는 거야. 그걸 잘 알고, 삶으로 실천한 생각만이 가치가 있는 거야. 너는 너에게 ‘허락된’ 세계가 반쪽 세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 그래서 목사님과 선생님들이 하듯이 남은 반쪽을 숨기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어. 일단 생각을 시작한 사람은 그렇게 해서는 행복하지 못하거든.”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니케북스, 128쪽


Chat GPT에 타자를 쳐서 나온 활자들을 줄줄 읊고 복사, 붙여 넣어도, 그것이 당신의 지식이 되진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편안하게 나올 수 있는 말, 그것만이 개인의 철학이자 진리다. 그 외의 것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처럼 무지의 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할 뿐이다. 진리와 진리의 부딪힘엔 필연적으로 다툼이 따라온다. 우리의 토론과 토의는 합의점을 찾는 일이지, 정답을 가리는 게 아니다. 세상엔 정답고, 세계의 진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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