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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뎌내고, 응시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_말테의 수기

by 박진권

견뎌내고,

응시한다



말테의 수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을유문화사




선명한 기억의 최초, 나의 부모님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행동을 추구했다. 비슷한 사회의 격통에 시달린 후 돌아온 가정에서 아버지는 신문을 보셨고, 어머니는 밥을 안쳐야 했다. 이후 설거지했고, 방 청소가 끝나서야 쉴 수 있었다. 나의 직선적인 눈은 그것이 참으로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에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운전하시잖아.”


그저 앉아서 핸들만 요리조리 꺾으면 되는 게 뭐가 그리 힘들까, 생각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나는 아버지 차를 탄 상태로 어떠한 사고도 겪은 적이 없다. 몇십 년 동안 ‘무사고’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된 것은 내가 면허를 딴 지 딱 10년이 되었을 때다. 아버지는 집에 필요한 소소한 가구를 직접 만들었고, 수명이 다한 전구를 교체했다. 어머니는 가족의 대소사부터 배우자와 자식들의 정신적, 신체적 긴장도를 완화했다.


이 밖에도 어떤 타당성과 피해를 찾으려고 하면 끝도 없이 찾을 수 있다. 여름휴가 및 가족 모임에서 혼자서만 일하러 갔던 아버지의 외로움, 명절마다 타자의 집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귀가하지 못하고 요리를 했던 어머니의 극심한 노고 등. 그러나 나의 부모님은 부정에 물들지 않았다. 고칠 수 없는 불합리함에서 서서히 멀어지길 택했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서로에게 보상을 전했다. 우리는 친가를 방문하지 않게 됐고, 아버지는 종종 요리에 빠져들었다.


타인의 환경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가장 가까웠던 각자의 선명한 선혈도 인지하지 못했으니까.



릴케의 시선은 추상적이면서도 놀랍도록 구체적이다. 정적인 사물을 동적으로 표현하고, 단일한 것에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삽입한다. 추상적임과 동시에 직설적이면서 또 부드럽다가 때론 거칠어진다. 전부 이해하지 않더라도, 공간과 상황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다. 섬세한 사상가의 노래는 글을 읽는 내내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과감한 시인의 추상적인 손길이 독자를 어루만진다. 릴케의 글은 읽다 보면 불명확한 글에서도 명확한 뜻을 얻어가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떤 비참함을, 또 어떤 비정함과 여타 부정을 시로써 매혹적이고, 명확하게 풀어낸 이 글은 이해를 내려놓고 단어 자체를 음미하다 보면 글의 진수를 느끼게 된다. 《말테의 수기》는 마치 산문처럼 느껴진다. 한 인간의 생애를 아주 덤덤하게 시적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곳엔 분명 온갖 감정과 격통이 존재하나, 대단히 우아하게 풀어냈다. 마치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세안하고 수염을 밀며 옷을 단정하게 매만지는 그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릴케의 글을 읽을 때 당부하고 싶은 점이 있다. 릴케의 사상을 곡해하지 말고, 그대로 읽었으면 한다. 완독하고 나서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겠지만, 읽는 동안이라도 최대한 순수하게 음미하길 바란다. 릴케의 글로 분열을 조장하는 짓은 아주아주 몹쓸 짓이니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_말테의 수기_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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