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_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헤르만 헤세
열림원
프란치스코와 헤세의 글은 깊은 연관이 있다. 대체로 유능한 소년기 다음 방탕한 청년기를 보낸다. 프란치스코가 이러한 삶을 살았다. 헤세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흙으로 돌아가거나, 번민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세계로 걸어간다. 기승전결은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매력을 선보이고, 특별한 고뇌에 빠지게 만든다.
헤세의 글을 읽을 때면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다. 나아가는 방향도 모호해진다. 어쩌면 그것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싯다르타를 읽고, 단순하게 ‘타자의 가르침보다 내 생각’이 중요하다고만 해석한다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일생의 모순을 집었다고 해설하는 순간 단순한 소설이 급작스럽게 복잡해진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벤라트는 마을 전체의 종용으로 심지 곧은 영재에서 불안하고 자조적이며 파괴적인 청년으로 변모한다. 그러다 결국 술에 취해 죽음을 맞이한다. 글에서 그의 죽음은 명확하게 다뤄지지도 않는다. 누구에게 맞아 죽은 것인지, 얼어서 동사한 건지, 물에 빠져 익사했는지 알 길이 없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의 사상은 붕괴한다. 그는 극단으로 치우친 공간에서 새로움을 창조한다. 오랜 시간 고통받고, 더 오랜 시간 인내한다. 그리하여 얻어낸 것은 무엇인가. 결국 세상엔 정답도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 죽음을 제외한 어떤 진리가 있다고 설파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 일 것이다.
《크눌프》에서 크눌프는 자유를 택했고, 고독을 감수했다. 그의 마지막은 대다수 인간이 원하지 않는 결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행복하게 눈을 감는다. 누군가에 귀속되지 않고,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채 두루두루 살아갔던 크눌프는 결국 개인적인 안락함 속에서 가장 큰 기대 하느님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영면에 든다. 이것이 불행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은 헤세 자신을 투영한 채 예술성과 회복을 추상적으로 설명한다. 온갖 부정적인 사건과 동시에 정신병이 악화한 헤세는 결국 스위스의 몬타뇰라로 이사한다. 그곳에서 데미안과 싯다르타 그리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 등 걸작을 쏟아낸다. 예술가에게 신경증은 뮤즈와도 같다. 정신병 없는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회복도 대단히 중요하다. 헤세는 정신병을 회복하며 훨씬 나은 글을 쓰게 됐고, 예술적으로도 성장했다. 더 유려해졌으며, 고급스러워졌다.
《싯다르타》는 모든 번민을 설명한다. 싯다르타라는 인물이 성 프란치스코와 가장 닮은 주인공이다. 이미 붓다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모든 성인을 떼쓰는 아이로 봤던 싯다르타가, 평범한 인간이 되고, 탐욕에 무너진다. 그러다 자기 안에 있는 옴의 소리를 듣고 다시금 진리를 관조하기 시작한다. 이미 성자라고 불렸던 그가 예기치 못한 사랑과 자식을 마주한 후 다시금 욕망이 꿈틀거렸고, 또다시 평범한 인간이 된다. 과거 돈에 집착하고 방탕한 삶을 살아가며 도박에 빠졌을 때보다 더 심한 한심한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고뇌를 거듭한 끝에 그는 다시금 득도의 길을 걷는다. 타자의 길이 아닌 자신만의 걸음으로 말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프란치스코는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끊임없는 욕구를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도, 금세 다른 목표를 설정했다. 매일 파티를 열어 방탕하게 살았고, 값비싼 물건을 구매한 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 그거 돌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던진다. 그렇게 부모, 형제, 친구, 지인에게 버림받고 아시시의 미치광이가 되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화를 내기도 했을 것이고, 다시금 방탕한 삶에 물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는 완전하게 변화했다.
그는 하루하루를 탁발로 연명했고, 무너진 성당을 혼자서 보수했다. 그렇게 한 명의 제자가 열 명, 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자 다시금 고뇌와 번민이 찾아온다. 더욱이 오랫동안 사라졌던 실망감이 마음의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하지만 결국 고요한 자연환경 속에서 평온함을 찾았고 그의 가장 깊은 근원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결국 그레고르 9세는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탄생이었다.
헤세가 그리는 주인공은 무한한 나태를 뜻하지 않는다. 반대로 무한한 성실을 내포하지도 않는다. 오점 없는 정의, 티끌 없는 깨끗함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어떤 성자도, 어떤 성인도, 오점이 있고, 티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오점을 완벽하게 지우려고 한다. 또는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반추한다. 헤세는 말한다. 그 모든 게 부질없음과 동시에 전부 의미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