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잡생각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선행된 잡념이 정화되기도 전에 계속해서 불필요한 생각이 밀려온다. 막아보려 해도 쉽지 않고, 다른 것을 하려고 해도 좀처럼 집중하기 어렵다. 그래서 탓을 한다. 바깥의 소음을, 타인의 숨소리를, 나를 제외한 모든 것에 책임을 전가한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늘 축약된다. 막상 펼쳐놓고 보면 방대하지도 않고, 깊은 것도 아니다. 무수한 단어가, 문장이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리며 떠도는데도 불구하고 무엇 하나 선보이기 어렵다. 대충 낚아채 접시 위에 올려두어도 막상 독자에게 대접하지 못한다.
과거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접했을 땐, 그다지 유쾌하게 읽은 기억이 없다. 성인이 된 후 독서 모임에서 종종 보였던 그 제목들에 왠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모두가 똑같은 소리를 하는 고전 중의 고전에 반감이 생기기도 했다. 다수가 읽고, 한마음 한뜻의 독후감을 내놓는 기현상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나 또한 판에 박힌 서평을 작성할 것 같아서, 애써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글이 써지지 않을 때 《수레바퀴 아래서》를 집어 들었다. 헤세의 이름값에 비해서 생소한 제목이었다. 초반부를 읽으며 싱거운 맛에 저자의 이름을 다시금 살펴봤다. ‘사람들’이 칭송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다음 맛도 느끼기 전에 주인공은 눈을 감았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나도 어느새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한스 기벤라트가 되어 있었다. 못 박힌 듯 한참을 앉아 있다가 눈을 떴다. 명치 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욕구가 들끓었고, 바로 노트북을 열어 글을 썼다. 그렇게 내리 4시간을 쉬지 않고 토해냈다. 당연히 고칠 게 많은 허점 많은 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낙관주의가 떠오른다. 현존하는 악을 덮기 위해, 그 악을 유포하는 인간들을 덮기 위해 낙관주의를 살포한다. ‘그대로도 괜찮고, 우리는 발전하고 있어!’,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없다. 결과물이 전부라는 게 아니다. 적어도 과정은 있어야 한다. 침대에 누워 작은 상자에 수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좋은 과정이 아니다. 청소, 공부, 애정을 미루고, 낙관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부정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헤세는 말한다.
“당시 독일 국민은 모두 소위 건전한 낙관주의에 젖어 모든 것이 훌륭하고 황홀하다고 여겼고, 마침내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쟁은 매우 위험하고 폭력적인 일이며, 전쟁이 결국 독일을 비참하게 만들고 끝날 거라고 말하는 모든 비관주의자를 벽에다 밀어붙이고 위협했다. 이렇게 비관주의자들은 조롱당하고 때로는 벽에 밀쳐졌지만, 낙관주의자들은 다가올 위대한 시대를 축하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 헤르만 헤세,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 반니.
헤세는 불평만 하는 비관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해결책을 제시하는 낭만주의자에 가깝다. 그가 걸었던 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나는 내가 걷는 길에서 잠시 벗어나 그가 걸었던 길을 되짚어보려 한다. 결국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오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