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_싯다르타
돈에 대한 욕심이 가득한 사람은 철학자가 될 수 없다. 단순하게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좋아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 철학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철학자의 기본 소양은 타인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들은 신발도, 옷도, 외모도 신경 쓰지 않는다. 돈이 싫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바라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의식주에 필요한 돈은 벌어야 한다. 구걸하며 철학자로 살아가는 시기는 지났으니까. 그렇다면, 이런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쇼펜하우어는 부자였다.’ 그렇다. 쇼펜하우어는 돈에 구애받지 않고 사유할 수 있는 철학자였다. 철학자 중엔 흔하지 않은 사람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돈에 미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발악했다거나, 의식주 이상의 어떤 금전적 이익을 원하지 않았다.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본인의 시선을 사유에 두었다.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다’에도 오해가 있을 법하다. 비싼 옷을 입는 것은 단정함이 따라온다. 좋은 용품을 사용하는 것 또한 청결에 깊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비싼 옷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며, 단정함에 무조건 필요한 조건도 아니다. 비싼 샴푸나 세안용품 또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며, 청결함에 무조건 필요한 조건도 아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가득하지 않다고 해서 무일푼을 지향하냐고 묻는 것은 적절한 반박이 아니다. 부자를 원하지 않는다고 거지를 선망한다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까지 설득하고 싶지는 않다.
철학자는 특별하지 않다. 그저 보편적인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일 뿐이다. 그 덕분에 평범에서 멀어질 뿐, 시기 받을 만큼 특별한 인간도 아니다. 그저 돈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뿐이다. 적다고 죽지 않고, 넘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게 지탄받을 일은 아니다. 나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 나름의 인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인생을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을 뿐이다. ‘잘 모르는 것을 싫어할 수는 없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지만, 불행을 막을 가능성을 올려준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돈에 매몰되는 게 더 불행하기에, 적당한 벌이를 택했다. 퇴근 후 좋아하는 책을 탐독할 수 있는 시간이, 소설을 쓰고 철학을 공부하는 게 좋다. 온갖 시행착오를 겪는 젊음에 감사한다. 언젠가 스스로 철학자라고 부를 수 있기를 고대하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대체로 크게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이 평범함이 은은하게 행복하다.
이 글을 읽고도 여전히 모를 수도, 싫을 수도 있다. 그것 또한 진심으로 존중한다.
자아를 찾는 일이 쉬웠다면, 부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 중심적인 사람은 세상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외부에 부정을 표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질투와 분노 등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은 자아가 확립되지 않은 인간의 마음을 더욱 쉽게 괴롭힌다. 물론 해탈의 경지에 올라 부처가 되는 게 목표가 아니라면, 세상의 부정을 완전한 무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긍정적인 방향성은 분명 존재한다. 부정을 안고서 부정적으로 나아가는 인간과 부정을 안고 어쨌거나 긍정적으로 나아가는 사람의 행복도는 차이가 크다.
인정하고, 인지하고서 부정을 개선하려 노력할 것이다. 한 번의 분노 표출로 금이 간 자아를 반추하며 보수하고, 한 번의 질투로 찌그러진 자아는 공부하며 올바르게 매만진다. 그럼에도 나는 평생 부족한 사람일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