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이야기 - 언어와 사고 (2)

김지씨의 수업일기 - 두, 세번째 시간 (2025학년도 2학기 중간)

by 국어교사 김지씨

두 번째 수업의 시작은 거창하다. 영화를 한 편 본다. 물론 한 편 전체를 다 보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은 없으니, 편리하게도 유튜버들이 제공하는 요약본을 학생들과 함께 본다. 그렇게 보는 영화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원작 Arrival)>이다. - 한 30분이면 영화 한편을 볼 수 있으니 얼매나 좋은(?) 태평천하인가 - 영화를 보기 전 문과생이 거의 전부인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는 이렇게 말해둔다. "문과생을 위한 SF!!! <인터스텔라> 보고 이과 애들이 깝치면 니네는 <컨택트>를 내밀어라!!"라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 영화에는 중요한 설정이 있다. 이른바 '헵타포드'라는 외계인들이 지구로 와서 의사소통을 요구한다. 언어 차이로 의사소통이 어려울 때 루이스라는 언어학자가 나서 외계인들과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우연히 발견한 그들의 문자는 우리와 너무 달랐다. 음성과 문자가 직접적으로 결합하지 않았으며, 그 모양 또한 원형이어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비선형적인(non-linear)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영화적 설정이 가미된다. 시작과 끝의 방향성이 없는 비선형적 언어를 쓰는 외계인들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현재-미래의 명확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외계어를 이런저런 과정에서 습득한 주인공 또한 그들과 비슷한 사고를 하게 된다. 이 설정의 핵심에는 '사피어-워프 가설'이 있다. 영화 속에서도 이 가설에 대한 언급을 하는데, 언어가 사고를 절대적으로 지배한다는 강력한 주장이 담긴 가설이다. 이 가설에 따라 주인공은 미래를 알 수 있게 된다. 이 능력으로 영화 속 중요한 갈등을 해결할 수 있게 되지만, 앞으로 자신의 딸이 불치의 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결국 딸을 갖는 선택을 한다는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 결말 또한 함께 진행된다.


물론 이 영화의 원작 소설에는 '사피어-워프 가설'과 함께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 또한 중요하게 다루어 진다. 이 수업은 언어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이 가설에 더 주목한다. 그래서 먼저 '사피어-워프 가설'과 관련된 자료들을 함께 읽는다. 그와 관련된 자료들 중 대표적인 것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누이트족 - '에스키모'로 아는 사람들도 많지만 - 의 언어이다. 눈과 얼음에 관련된 어휘가 극단적으로 발달된 언어를 사용하다 보니, 눈과 얼음에 대한 비상한 감각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를 좀 더 친숙하게 이해하기 위해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일부를 가져왔다. 이누이트족 출신 스밀라는 바다가 얼어가는 독특한 상황을 섬세하게 구분된 어휘체계를 활용하여 실감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도 예는 많다. 더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색채어 분화에 따라 언어권별로 무지개색의 수가 다르다는 근거도 있다. 분절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의 특성 상 무지개색을 분절하여 인식하게 되는데, 그때 그 언어가 구분한 무지개색 숫자로 그 언어권에 속한 언중은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또 미국 원주민 - '인디언'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 중 호피족의 언어는 '헵타포드어'처럼 시간 개념어가 없기 때문에 언어 사용자들이 시간 흐름을 인식할 수 없다고 보는 사례도 덧붙인다. 여기에 친족어 체계가 미친듯이 복잡하게 구성된 한국어를 사용하면 꼰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례까지 흥미를 돋울 겸 집어넣을 수도 있다. 첫 시간에 봤던 숏박스를 떠올릴 수 있다. 반대로 말레이어에서 형제자매를 가리키는 친족어는 하나밖에 없으니 위-아래를 모를 수도 있겠다는 추측도 은근히 흘려본다.


아주 성실한 교과서는 보통 여기 정도까지 언급할 수 있다. 교과목 자체가 '언어와 매체'이다 보니 '언어'와 '매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낀 것 같다. 하지만 '사피어-워프 가설'은 그야말로 '가설'일 뿐이다. 이에 대해 언어는 사고를 반영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반박이 이미 충분히 제기되어 있다. 촘스키 옹의 어려운 학설을 가져오기는 그렇고 해서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를 좀 따와서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그는 '사피어-워프' 특히 워프가 제시한 근거들이 하나같이 형편없음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이누이트족 사례는 그들이 쓰는 유피크 및 이누이트-이누피아크어에 대한 문법적 이해가 없어서 나온 주장이며, 무지개 사례는 언어권로 분화된 색채어 체계가 숫자는 달라도 비슷한 구조와 순서로 형성되어 있음을 밝힌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색깔에 경계를 지을 근거를 찾아내지 못할지언정 생리학자들은 찾아낸다. 눈이 파장을 감지하는 방식은 온도계가 온도를 기록하는 방식과 다르다. 눈에는 각기 다른 색조를 가진 세 가지 원추체가 있는데, 이 원추체들은 녹색 바탕에 빨간색 점이나 그 반대, 청색 대 노란색, 검정색 대 흰색에 가장 잘 반응할 수 있도록 신경세포에 연결되어 있다. 언어가 아무리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어가 망막에까지 손을 뻗쳐 신경절세포를 재배선한다는 것은 생리학자들로서 황당할 뿐이다.

스티븐 핑커, <언어본능(Language Instinct) - 마음은 언어를 어떻게 만드는가>


그 뒤 산수 개념이 전혀 없는 5개월 아기들이 간단한 암산을 할 수 있으며, 언어를 전혀 모르는 버빗원숭이가 체계적인 친족 구조를 가지고 있고, 위대한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언어 없이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 뒤 시를 썼다는 근거들을 제시하며, 언어에 마음에 지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야말로 조곤조곤 씹고 있는 느낌이다.


이 정도까지 가면 학생들은 '사피어-워프 가설'을 거의 쓰레기 취급을 하게 된다. 그러면 '사피어-워프 가설'이 완전히 틀린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런 맥락에서 스티븐 핑커의 주장을 조금 중화시키는 글을 하나 같이 읽는다. 이른바 '신워프주의자'라 불리는 레라 보로디츠키는 워프의 주장이 양식있는 언어학자들에 의해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에 반론을 제기한다. 중국어 화자에게서 시간 방향이 상, 하로 나타나는 점, 문법 상 명사에 성별이 부여된 단어들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가 다른 점, - 이 또한 고정된 성역할을 반영한다는 비판이 따를 수 있겠지만 - 호주의 원주민 중 타요레족이 고정된 기본 방위만을 사용하는 언어를 쓰면서 네비에 가까운 위치 관념을 가지게 된 점 등을 들어 워프의 주장이 일면 타당성이 있음을 입증한다. 물론 언어가 사고를 완전히 지배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일종의 방향을 잡아주는 기능을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은 로버트 레인 그린, <모든 언어를 꽃피게 하라... 말에 관한 잔소리의 사회사>에서 참조하였다.


이렇게 수업이 흘러가면 학생들은 당연히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나는 이런 혼란이 공부의 즐거움을 증폭시킨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기에는 좀 더 구체적인 의도 또한 개입되어 있다. 이런 수업 설계는 1차적으로 기존에 학생들에게 자리잡고 있는 언어의 기능과 관련된 오개념을 수정하려는 의도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언어의 영향을 실제보다 더욱 강조하는 주장들 중에선 말도 안되는 유사-과학, 예를 들어 '고운말을 듣고 자란 양파가 잘 자란다'는 둥,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둥, 관습적 미신에 가까운 생각들을 그럴싸하게 재생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 오웰의 <1984>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듯이 언어에 대한 통제는 역사적으로 지배이념을 주입하는 불순한 시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새나라의 어린이는 바른말 고운말을 씁니다'라는 철지난 구호를 떠올려 보자. 새나라에 어울리는 '바른말'과 '고운말'이야말로 텅 빈 기표에 불과하며, 이 기표 안에 어떤 기의를 집어넣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의 몫이기 마련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자유주의적 언어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라 비판할 수도 있다. 지나친 외래어 사용을 막고 우리말을 문법적으로 새롭게 정립하고, 적절한 어휘나 표현들을 언중에 유통시키는 시도를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주시경, 최현배 선생을 비롯하여 이오덕, 김수업 선생님 같은 분들의 업적을 폄하할 생각도 없으며, 오히려 교사로서 깊이 존경하는 입장이다. 언어를 얼마나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신 선생님들의 말씀들은 교사로서 깊이 새겨둘 만하다.


하지만 언어를 통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권력을 동반한 강제적 방법을 통해 집단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는 것에는 쉽게 찬성할 수가 없다. 새롭게 통일국가를 형성한 독일에서 라틴어를 배제한 순수 독일어 운동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듯이 언어를 이념에 따라 인위적으로 교정하려는 시도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피어-워프 가설'을 둘러싼 모험에 가까운 이 수업은 마지막으로 세 가지 당부를 남기며 끝난다. 언어의 상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 것. 어떤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더 뛰어나다는 착각을 금할 것. 언어를 통해 인간의 행위를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지 말 것.

그리고 숙제를 하나 덧붙인다. 숙제는 다음과 같다.


다음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내용이다.

언어의 기능과 관련된 두 가지 입장( 사피어-워프 가설 /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을 고려하여

'뉴스피크어'가 과연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지를 논리적으로 서술하시오. (단, 500자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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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피크어의 목적은 잉속(Ingsoc, 영국 사회주의) 신봉자들에게 적절한 세계관과 마음의 습관을 위한 표현수단을 제공하는 동시에 그 밖의 일체의 사고방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적어도 사고가 언어에 종속되어 있는 한, 일단 그리고 영구히 뉴스피크어가 채택되어 올드스피크어가 잊혀지게 되면 이단적 사고, 즉 잉속의 원칙에서 벗어난 사고는 말 그대로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리라는 것이 그 의도였다.

뉴스피크어의 어휘는 당원이라면 마땅히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의미를 정확하게, 때로는 아주 미묘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으며, 반면에 여타의 모든 의미들이나 간접적인 표현방식의 가능성을 배제됐다. 이는 부분적으로 새로운 단어들을 고안함으로써, 그러나 주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단어들을 제거하고, 그러한 단어들에서 비정통적인 의미를 벗겨내고, 그리하여, 가급적 일체의 이차적 의미를 배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free라는 단어는 뉴스피크어에도 여전히 남아 있으나, This dog is free from lice(이 개는 이가 없다). 또는 This field is free from weeds(이 밭에는 잡초가 없다).와 같은 진술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 정치적 ․ 지적 자유는 개념으로조차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당연히 명명될 수도 없으므로, 이 단어는 politically free나 intellectually free라는 옛 의미로는 사용될 수 없다.  

…서양장기(체스)에 대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이 ‘퀸’과 ‘루크’의 이차적 의미를 모르듯이, 뉴스피크어를 유일한 언어로 사용하면서 성장한 사람은 equal이라는 단어가 한때 politically equal이라는 이차적 의미를 가졌다거나, free라는 단어가 한때 intellectually free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다. 수많은 범죄와 오류들이 지칭할 이름이 없고, 그래서 상상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범할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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