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를 끝까지 읽고
놀랍게도 최근에는 페이스북이나 책 구매 사이트를 제외하곤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책 추천을 받아본 일이 거의 없었다. 교사 재교육 차원에서 다니던 성공회대 대학원에서 어마무시한 지적 자극을 받았던 이후 그런 일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폭이 좁아지고 단순해지고 있다는 증거인 듯 한데, 가끔씩 아내가 직장(출판사)에서 가져다 주는 책 또한 책상에 겅성드뭇하게 흩어져 있을 뿐 이를 진지하게 읽어볼 엄두를 못내고 있다. 물론 이는 어쭙잖게 책 한 권을 덜컥 계약해서 원고를 써야하지만, 자료 준비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일상 속 게으름으로 젖어든 탓이 크다. 아마도 '원고 준비도 제대로 안 하고 책은 무슨 책'하는 생각이 전제처럼 머리에 박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몇 번 생겼고, 놀랍게도 책을 깨나 읽는 40대 후반 남성 친구 두 명에게서 - 40대 남성이 소설 책을 깨나 읽는 것, 그리고 소설 책을 추천하는 것 모두 놀라운 일이다 - 공통적으로 한 권의 책을 추천받게 되었다. 그 책은 <스토너>였는데, 도대체 친구들이 극찬을 섞어 추천할 만한 무언가가 있는지 궁금해 결국 책을 구입해 읽어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밤늦도록 책을 읽고 묵직한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다시 말해 목적없이 책을 읽고 그 속에서 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던 진짜 독서의 즐거움을 오랜만에 깨닫해주었다.
앞서 책 앞부분에서 만난 한 장면이 나에게 준 인상에 대해 간략한 글을 쓴 바 있다. 교사가 될 수 있다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던 주인공의 놀라움을 표현한 장면이었다. 이후에 주인공 스토너는 대학 강단에 서게 되는데, 난 그가 어떤 교사가 될 지 상당히 궁금해졌다. 이 작품은 영문학 교수의 이야기이고, 그의 삶 속에서는 영문법과 영문학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 영역을 제자들에게 어떻게하면 더 잘 가르칠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치열한 열정을 가진 교수가 된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게 전부인 삶이었다. 그는 학계의 주목을 받지도, 주변의 인정을 받지도, 심지어 가정의 행복을 누리지도 못한 삶을 살다가 떠나게 된다.
이런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서술된 소설이 <스토너>였다. 물론 앤드류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나왔던 것 같은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긴 했다. 그렇지만 스토너에게 그 사건 또한 삶에서 감내해야 할 여러 가지 무게를 하나 더 얹어준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평생을 땅에서 살아왔던 그의 부모님들이 그 모든 것들을 짊어지고 살면서 감내했던 그 무게들처럼. 어쩌면 스토너와 그의 부모는 삶의 터전만 달랐을 뿐 무섭도록 닮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심지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시간이 되면 땅으로 돌아가 묵묵히 쟁기질을 시작했던 아버지처럼, 스토너 또한 영문법과 영문학을 뿌리고 수확을 거둘 학생들이 있는 강단으로 돌아갔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스토너는 위대한 인물이다. 적어도 교사 입장에서는 그렇다. 교사와 농부를 비교한 상투적인 비유들이 - '농부의 발걸음을 먹고 식물은 자라듯이 교사의 눈빛을 먹고 학생은 자란다'와 같이 - 심금을 울릴 때가 있는 것도 다 그 두 직업의 유사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자신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존재를 성장시키는 과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그런데 식물은 보란듯이 그 결과를 열매로 증명하지만 학생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그 차이는 확연하다. 그래서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위대한 교사'가 되기는 참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스토너는 평생을 걸쳐 수행했다.
그렇지만 그의 삶은 어느 누구에게도 인상깊게 남은 삶은 아니었다. 고작 도서관에 그의 이름으로 기부된 중세 문헌들과 그가 쓴 책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주제의 그 책으로. 그런 점에서 스토너가 죽기 직전 책을 들었다 떨어뜨린 장면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의 삶은 기형도가 <오래된 서적>에서 말했던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가 완벽하게 되어 버렸다.
어린 시절 어쩌면 나는 지독한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자기 직전에 매일매일 비슷한 고민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고민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놀랍게도 고등학교 시절 잠들기 전 이런 고민을 했다. '지금 내가 죽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 울어줄 것인가?' 아마도 상대적으로 독특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외로움을 느꼈고, 그것이 사춘기 소년(?)의 진지한 고민이 되었겠지만 그때는 그게 그렇게 중요했다. 친구들을 만나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어떻게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강박 아닌 강박 또한 이런 고민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교사가 되었다. 매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되었고, 나는 그들에게 열정적인 교사이자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 안팎에선 나를 최소한 열정적인 교사로 불러주었다. 그리고 몇 권의 책 또한 쓰게 되었다. 물론 그리 주목받을 만한 명저가 아닌 것은 분명하고, 그야말로 스토너만큼 좁은 독자층을 가진 책이지만, 그 속에서 나는 당신들이 충분히 애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임을 드러내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돌아보면 이런 저런 삶의 행적들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많은 에움길이 아니었나 싶다. 학생들과 재미나는 수업을 하고, 수업의 이모저모를 담은 책을 써낼 때에는 난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다. 어쨌거나 지금 죽는다고 하더라도 나를 기억하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고, 심지어 책을 매개로 시간을 넘어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더 생겨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스토너>는 나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그것이 전해지건 전해지지 않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위대한 농부의 아들로서, 위대한 교사로 살아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 자체로 우리 삶은 완결되는 게 아닌가'라고... 이때쯤 되서야 친구들이 이 책을 권한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큰 기대로 삶을 불태우던 시기를 지나, 어느 정도 지위를 차지하고 어쩌면 누군가는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삶이 이렇게 마무리되어 가겠구나'라는 소멸에 대한 직감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시기에, '스토너'의 삶은 자연스럽게 눈가를 촉촉하게 만든다. 나 또한 그 길을 가겠다라는 서글픈 예상과 함께, 그 또한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소박한 위로를 전해주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