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따라 꽃멍 숲멍(여름) | 연꽃 | 함안아라홍련
지난해와 올여름은 유난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각 지역마다 기상 관측 이래 각종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기나긴 더위에 사람들은 힘겨워한다. 그런데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이 어디 날씨뿐이랴. 살다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크고 작은 난관이 우리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외부 갈등의 소용돌이에 뜻하지 않게 빠지기도 한다. 마음 안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하는 번뇌와 고민은 또 어떠한가.
무더위에 지치고 마음이 복잡한 여름날, 함안으로 연꽃을 만나러 간다. 햇살이 뜨거워지기 전에 아침 일찍 출발한다.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야읍 초입에 연꽃테마파크가 있다. 아라가야 왕궁지 앞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일찍 도착한 덕분에 주차도 여유롭다.
입구에 관광안내소가 있다. 안내원 두 사람이 반갑게 맞아준다. 진분홍 연꽃 색깔의 양산도 빌려주고, 사진 콘테스트도 열리는 중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리플릿을 펼쳐보니 무엇보다 이곳의 연꽃이 특별하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연꽃인 아라홍련과, 우리나라 최고의 자생 연꽃인 법수홍련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아라홍련은 씨앗이 싹을 틔우기까지 무려 700여 년의 시간을 견뎌냈다고 한다. 2009년 함안 성산산성의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700년 전 고려말의 연꽃 씨앗으로 밝혀졌다. 첫해에는 세 알에서 싹을 트고 잎만 보여주었고, 이듬해 마침내 붉은 연꽃이 피었다. 옛 함안 지역의 아라가야에서 이름을 따서 ‘아라홍련’이라 불리게 되었다.
양산을 쓰고 아내와 나란히 연못 주위를 걷는다. 이미 연밥도 제법 많은 걸 보니 개화가 이제 절정을 막 지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곳곳에 연꽃이 어여쁘게 피어있다. 모든 꽃이 그렇지만, 연꽃은 각각 하나의 온전한 우주다. 모양과 빛깔이 감동적이다. 카메라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아라홍련은 요즘 흔히 보는 연꽃과는 모습이 조금 다르다. 대개 홍련이 짙은 홍색이나 선홍색인데, 아라홍련은 꽃잎 아래가 흰색, 중간이 선홍색, 끝이 진한 홍색이며, 꽃잎 수도 더 적다. 고려시대 탱화에서 볼 수 있는 모습에 가깝다고 한다. 700년 넘도록 씨앗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고, 그 옛날 모습으로 다시 꽃을 피워낸 것도 경이롭다.
테마파크에는 전망대와 분수도 있고, 정자도 곳곳에 있다. 연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한 바퀴 돌고 나서, 가장 높은 정자 2층에 올라가 앉는다. 야외인데도 벽걸이 선풍기가 두 대나 있어 시원한 바람을 쐴 수 있다. 아내는 서서 편액을 읽고, 나는 앉아 연못을 내려본다. 햇살을 받은 연꽃들이 오므렸던 봉오리를 활짝 활짝 펼친다. 매미 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에 복잡한 고민이 날아가고 내 마음도 같이 활짝 펴진다.
오늘도 무성한 녹음이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린다. 무더위에 일상이 지쳐 간다면 아라홍련을 만나러 가자. 내리쬐는 여름 볕과 열악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 번뇌와 시련의 날에도 맑고 향기로움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한 줄기 위안을 받을지도...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 서정주,『질마재로 돌아가다』 (미래문화사, 2001)
◉ 연꽃 꽃말: 깨끗한 마음, 신성, 침착, 청결, 소외된 사랑
◈ 전국 연꽃 명소
*함안 연꽃테마파크에 가시면 8월 초순까지는 연꽃을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연꽃이 지기 전에 글을 올리느라 브런치북 원래 연재 순서를 당겼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