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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Aug 02. 2018

모르도르에서 오트케이크 한 조각

더위에 지친 입맛을 위해 스코티쉬 오트케이크를 굽다

'모르도르'(Mordor)는 200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두 개의 판타지 영화 가운데 하나인 '반지의 제왕' 삼부작에서 중간계에 위치한 악의 제왕 사우론의 본거지이다.


('반지의 제왕'은 물론 소설이 원작으로, 1950년대 출간된 톨킨의 동명 소설이 영미 문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영화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영화를 통해서 더 많이 알려진 부분이 크다고 볼 수 있으니 우선은 영화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영화 '반지의 제왕' 속 이야기의 큰 줄기 중 하나는 운명의 산에서 절대반지를 파괴하려는 호빗 프로도와 샘의 여정이다. 그들은 원정대 대부분을 잃고 고생하면서 결국 사우론이 지배하는 화산으로 이뤄진 땅 모르도르에 다다르게 된다. 프로도와 샘은 절대반지가 주는 유혹과 싸우면서, 타는 듯이 뜨겁고 풀 한 포기 조차 자라지 않는 바위로 이뤄진 척박한 땅을 걸어간다.


운명의 산에는 과연 다다를 수 있을런지, 동행하는 골룸을 믿어도 될른지, 사우론의 방해없이 절대반지를 파괴할 수 있을지 걱정되지만, 그들이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일 뿐이다. 그리고, 이따금씩 휴식을 취하면서 풀잎에 싼 렘바스(Lembas) 빵으로 끼니를 연명한다.




이게 바로 모르도르 한 가운데 있는 기분일까.


지난 이주일동안 낮 최고기온이 섭씨 35도를 넘는 더위가 계속되었다. 밖에 나가면 온몸이 양초처럼 녹아서 흘러내릴 것 같은 용광로같은 날씨는, 체감상 모르도르의 뜨거운 바위산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다. 여기서 내가 한순간도 떼어놓고 싶지 않은 것은 절대반지가 아니라 에어컨이고, 이렇게 더위에 개고생하는 이유도 사우론이 아니라 기후변화 때문이지만, 어쨌건 모르도르는 모르도르다.


더위에 지친 입안은 깔깔하고 뭘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요리도 하기 싫고, 그렇다고 뭘 사먹기 위해 에어컨 없는 바깥으로 한 발짝 내딛기도 싫다. 나는 탈진한 프로도처럼 픽 쓰러지면서 스스로에게 중얼거린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한 조각의 렘바스야.

한 입 만 먹으면 장정 한 사람도 거뜬히 하루를 날 수 있다는 그 빵은 엘프들만이 만들수 있고 엘프들만이 맛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반지원정대에게는 특별히 선물로 주어졌고, 영화에서 프로도와 샘이 모르도르에서 렘바스를 먹었던 이유는 바로 그 덕분이었다. 렘바스는 노르스름한 겉면에 바삭바삭한 비스킷처럼 생겼다고 한다.  


프로도를 위해서 샘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풀잎에 싼 렘바스를 꺼내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했다.


내 상상 속에서 렘바스는 오트케이크와 같은 맛이었다. 푸석해보이지만, 사실은 바삭하고 고소한 향이 풍겨나는 오트케이크.






스코티쉬 오트케이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케이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생겼다. 케이크라고 하면 으레 생각하는 폭신폭신한 느낌도 없고, 빵과 같은 부피감도 없다. 스코티쉬 오트케이크는 오트밀과 물 등으로 구워내는 비스킷에 가깝다.


로마 침략기에도 존재했었다는 이 오트케이크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식량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하며, 사실 간식이라기 보다는 식사에 가까운 음식이다.


가스렌지 근처에 가고 싶지도 않은 더운 여름, 나는 분쇄기에 오트밀을 갈아서 가루를 만든다. 거칠게 갈린 가루 위에 소금을 치고, 올리브유를 프라이팬에 두르듯 스윽 뿌린다. 그리고 생수통의 물을 적당히 부어가면서 스파출라로 대강대강 반죽을 한다. 얼추 반죽형태가 갖춰지면 냉장고에 잠시 뒀다가 꺼내서 도마에 놓고 밀대로 얇게 민다.


아차, 쿠키용 틀이 없다. 그러나 오늘 오트케이크를 꼭 구워야겠다고 생각한 자에게 쿠키용 틀의 부재는 장애물도 아니다. 나는 찬장에서 사각의 종지그릇을 꺼내 쿠키용 틀 대신 반죽에 눌러 찍어낸다. 그리고 180도 가량으로 예열한 오븐(심지어 토스터오븐이다)에다, 찍어낸 반죽을 올려놓은 판을 넣고 25분 정도 굽는다. 날씨도 더우니, 귀찮아서 타이머 따윈 설정하지않는다.


오븐에서 오트밀의 고소한 향내가 나기 시작한다. 밀가루의 풋내도 아니고, 갓 한 밥에서 나는 뜨끈한 풀내도 아니고, 오트밀 특유의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난다.




진하게 우린 잉글리쉬 블랙퍼스트 홍차에다 우유를 넣고 설탕을 한 스푼 넣는다. 그리고 식혀놓은 오트케이크를 꺼내 접시에 서너 개 놓고, 그 위에 차가운 크림치즈와 딸기잼을 올린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오트케이크를 베어문다.


차가운 잼과 치즈 덕에 조금 부드러워져있지만 여전히 바삭바삭하다. 입 안에 단맛과 함께 고소함이 감돈다.


이 순간, 오트케이크 외에 다른 아무것도 필요없다. 달콤하고 고소한 이 오트케이크를 한 입 베어물 때마다, 황금빛 생명이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 마치 렘바스 빵을 한 입 베어먹은 사람처럼 힘이 난다.


오트밀은 늘 내 입맛을 구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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