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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Apr 14. 2019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여유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사랑에 빠졌고, 사랑이 나를 더 나아지게 한다

무기력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바꾸리라고 월든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그것은 순탄치 않았다. 


바뀌는 것은 거의 없었다. 월든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나는 그저 현재가 싫은 것 뿐이었고, 목표 없는 월든 프로젝트는 규칙적인 운동과 밀프렙, 인간관계 정리와 같은 주변적인 것을 반복해서 맴돌다가 계기만 있으면 어긋나곤 했다. 


내 삶이 무기력하고 무미건조해진 것은, 열정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열정이 사라진 이유는, 사람들에게 너무 치여서 정신적으로 피로해졌기 때문이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와 그로 인해 생겨난 편집증에 가까운 피해의식이, 규칙적인 운동과 밀프렙, 인간관계 정리 따위로 간단히 사라질 리가 없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아무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에게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나는 도움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기, 

나는 그 사람을 만났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조금은 구식인 아저씨라고 생각했다. 그는 토요일에 정장을 입고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고, 나보다 8살 정도 많았고, 남자가 늘 계산을 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그와의 대화는 의외로 즐거웠다. 우리는 카페에서 3시간 넘게 온갖 주제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고, 갤러리로 자리를 옮겨서 전시를 보면서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와 서로 계산서를 집어들려고 말 그대로 미식축구 선수처럼 몸싸움을 벌였다. 다음 만남에서는 거의 8시간 가까이 함께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기 아쉬워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따뜻하고 자상했고, 편견이 없고 잘 웃는 사람이었다. 


나는 거의 두 달 만에 그와의 관계를 '연애'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와의 연애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연애와 완전히 달랐다.  


철이 들고 나서 나는 연애를 할 때 한 번도 화장을 안하고 애인을 만난 적이 없었고, 흐트러진 모습을 절대로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애인과 오래 데이트를 하게 되면 피로를 느끼기 까지 했다. 대화 하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대체로 나는 애인과의 일상적인 대화를 '견디고', 오랜시간 용건없는 전화통화를 '감내하면서' 연애를 하다가 결국 그것을 끝내곤 했다. 나는 이따금씩 다른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능력이 나에겐 없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연애불능자'에 가깝도록 연애를 힘들어 했던 것은 내 안에 타인을 위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인간이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법이지만 나는 유독 더 그랬다. 소설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전시를 만들면서 나는 한 번도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늘 나 자신을 표현하고 나의 생각을 세상에 펌프질하려고만 생각했었고 타인들이 내 진심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내가 지친 것은 사람들에게 치여서 피로해진 것이지만, 월든 프로젝트를 하면서 나에게는 오히려 타인을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 여유 안에, 그가 걸어들어왔다. 




나는 그의 앞에서 큰 소리로 방구를 끼고, 코를 풀며, 엄청난 속도로 음식을 먹어치운다. 그의 콧구멍을 손가락으로 장난스레 찌르고, 기분이 내키면 혼자 집에서 추곤하는 이상한 동작의 춤을 그의 앞에서 추기도 하며, 화장을 하지 않고 눈꼽을 떼지도 않은 부스스한 모습으로 그에게 키스를 한다. 


나는 그와 끊임없이 수많은 주제로 대화를 했고, 그 주제에는 내가 모르는 것과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들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나는 애인과의 대화를 견뎌야 할 필요가 없었다. 더 오랫동안 대화를 못해서 늘 아쉬워하곤 했으니까. 나는 그에게 왜 나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하느냐고 화를 내고, 집청소와 설겆이를 제대로 하라고 잔소리를 한다. 


나는 그의 작은 버릇들도 센다. 그는 거울을 보고 입을 비쭉 내밀면서 머리를 쓸어내리곤 하며, 이따금씩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안경 너머로 나를 쳐다보며 장난스런 미소를 짓곤 한다. 그의 주머니에는 동전과 반쯤 쓰다 만 기름종이 같은 것들이 늘 가득차 있다. 그는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면서 나를 놀리기를 좋아하고, 내가 손가락으로 배를 쿡 찌르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친다. 나는 이 모든 모습들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월든 프로젝트에서 추구했던 '열정을 되찾는' 목표가 모두 이뤄졌다고 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지금 내 몸 안에는 행복감을 주는 세로토닌이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여전히 나는 글을 쓰지 못하고 일을 겨우겨우 해내고 있다. 오히려 나는 연애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애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까 매일 고민할 뿐이다. 어쩌면 예전처럼 열정에 가득차서 혼자 심취해서 일을 하는 일 따위는 다시는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일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의 존재로 말미암아 내 인생은 충만해지고 타인의 음해와 비난에도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힘이 생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때문에 그 사랑을 잃지나 않을까 두렵고 초조하다. 


나는 하늘로 치솟는 행복감과 지옥같은 불안 사이에 서서, 내가 그러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을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왜냐면 내가 열정을 되찾지 못한다고 해도, 그는 나를 사랑할 것임을 알기에. 그리고 나 자신도 나를 사랑해야 할 것임을 알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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