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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Jun 05. 2018

보다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2

목표 따윈 미뤄놓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 엄청나게 공을 들이기

https://brunch.co.kr/@ethnographer/94


'난 지금 아무것도 안하기를 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거야', 라고 거창하게 매니페스토라도 써뒀으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도 그건 사실이 아니다. 무기력한 내 삶에 열정을 가져다 줄 목표 만들기를 빼놓고 규칙적인 생활과 균형잡힌 식사, 가벼운 운동을 끌어다놓고 나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가 되어버린 것 뿐이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을 '아무것도 안하기'였다. 


나는 어떤 이상형을 만들어놓고서 스스로가 그런 인간이라고 믿어버리는 허황된 재능이 있었다.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알고 일처리가 무척이나 빠르고(성질이 급하므로 일정부분은 맞지만) 이뤄야 하는 목표가 있으면 앞뒤 재지 않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열정적인(이것도 일정부분 맞긴 하지만) 사람.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며, 스스로가 그렇다고 믿고 싶은 사람이다. 그렇게 자신을 더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현실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당장 회피모드로 들어가버린다. 내가 그만 둔 것은 기대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기대하는 행위를 멈췄다는 뜻이다. 


과정이야 어쨌건 간에, 

나는 스스로를 통제 잘하고 늘 목표가 있는 빠릿빠릿한 사람이 되기를 멈추었다. 


왜 샀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한국분석철학회에서 발간한 철학서를 보면서 한숨짓거나, 책장을 보다가 앤디 위어의 신간에 먼저 손이 가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가끔씩 술을 마시거나 몸에 해로운 간식을 먹기는 하지만 '가끔씩은 풀어줘야해'나 '아, 이건 하나에 00칼로리인데'라는 생각 따윈 하지 않고, 그저 그 순간 시원한 모스카토가 마시고 싶어서 와인을 사고, 치즈를 듬뿍 올린 바삭한 나초칩은 입에 들어오는 그 순간 바삭한 감칠맛을 음미하며 먹는다. 딱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영어학원 주말반에 열심히 다녔던 적도 있지만, 최근에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이것 이니까, 하면서 목표를 만들어놓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몰아대는 짓도 하지 않는다. 


내가 우리 동네의 유일한 큐레이터니까 국내외 전시는 내가 다 꿰고 있어야 해, 라는 허영심어린 생각으로 전시를 보러가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때그때 내가 보고 싶은 전시를 보고 박물관을 관람한다. 나는 작가니까 얼른 새로운 책을 써서 '작가이기'를 계속해야해, 라는 생각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가 결국 넷플릭스를 탐험하다가 밤을 새고 다음 날 죄책감을 느껴서 시청을 끊어버리는 짓도 그만두었다. (그냥 처음부터 부담없이 넷플릭스를 본다) 나는 지식인이니까, 배운 사람이니까, 하는 과잉 자의식으로 관심도 없고 읽지도 않을 책을 예스24에서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뺐다하는 것은 멈추고, '살아있는 시체들의 연애'를 반복해서 읽으며 킥킥거린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내가 열정을 다바칠 목표를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초조함을 억누르고, 오히려 목표를 만들지 않겠다고 생각하자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종종 하고 싶은 것이 생겨난다. 


외국어 배우기에 대한 강박을 멈추니까, 쓰지 않던 외국어들을 쓸 일이 우연찮게 생긴...다기 보다는 그런 기회를 스스로 만들게 된다. 읽지 않던 외국어 책을 꺼내보게 된다. 고요한 일상을 영위하려고 하니까 사람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고 싶어서 바깥으로 나가진다. 갑자기 전시가 너무너무 보고 싶고, 좋은 전시 연계 프로그램에 대해 조사를 해보고 싶어져서 아는 박물관 관계자에게 연락을 한다. 

 

글을 쓰고자하는 강박을 멈추자 소설이 너무너무 쓰고 싶었다. 묻어둔 이야기들과 쓰지 않은 이야기의 등장인인물들이 하는 말을 수첩에 끄적이기 시작한다. 그냥 가벼운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나 보자, 모드가 되니 갑자기 (그리고 뜬금없이) 러시아 혁명사를 연구하고 싶어지며 거기에 관련된 책이 읽고 싶다. 


이쯤되면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하기를 하니까 내 삶이 확 달라졌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 소설가적인 충동도 어마어마하게 든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사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픽션에서나 가능하다. 


외국어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불태우고, 머리 속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주체하질 못해서 밤새 소설을 쓰고, 인상깊은 전시에 대해 에세이를 쓰며, 러시아 혁명사에 대해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 대학원 시험을 치는 허황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외국어 책을 꺼내보다가도 몇 장 넘겨보고 그냥 덮었고, 소설은 아이디어를 조금씩 끄적이는 정도. 여전히 사람들과는 잘 지내지 못한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사에 대한 책들을 기웃거리다가 몇 주 전에 한 권 사기는 했지만 아직도 다 읽지 못했다. 


여전히, 내 삶에서 대부분의 에너지가 일상을 영위하고 그것을 온전히 느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과거의 내가 보기에 나는 무기력해 보이고, 중요한 문제에서 회피하는 것 같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으며,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는 완전해지고 안정된 느낌이다. 




1여년 전, 내가 무기력에 빠져들었던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일수도 있고, 정신적으로 지쳤기 때문일수도 있으며, 사람들에게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 수많은 이유 중에,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는 불만족감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초조함. 뭔가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 늘 다른 것을 하기 위해서 일상을 보류하고 있다는 느낌.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가기 위해서 이도 저도 아닌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규칙적인 일상만을 온전히 살아가는 몇 달 동안, 나는 일상이 주는 친숙한 리듬이 익숙해졌다. 마치 훈련이라도 한 것 처럼 말이다. 부담감 같은 것은 치워버리고 하루 하루 일상이 온전히 쌓이자, 다른 곳을 향해서 혹은 밖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뭔가 다른 것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도했다가 벽에 부딪혀도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온 힘을 다 바쳐서, 보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 일상을 영위하는 행위는 나에게 일종의 '디폴트값'을 만들어주었다. 새로운 버전이 실패해도, 실수가 있어도, 초기화 할 수 있는 바탕. 


앞으로도 나는 했다가 포기하는 일도 많을 것이다. 엉뚱한 데서 삽질하는 경우도 왕왕 있을 것이고, 그러다가 또 주저앉아서 무기력에 빠져드는 때도 분명히 있을 것인다. 월든 프로젝트를 접어버리는 일도 벌어질 것이며, 오늘 내가 썼던 글을 보면서 '뭐 이런 멍청한 소리야'라고 투덜대는 날도 올 것이다. 


그게 뭐 어때서? 


어쨌거나 저쨌거나, 안되면 다시 지금처럼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는 소소한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된다. 


돌로 곡물을 빻고 민무늬토기를 굽던 청동기인부터 하루종일 밭을 매던 화전민까지 밥을 먹고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던 수많은 평범한 인류 가운데 하나로 나를 받아들인다. 운이 좋다면 이따금씩 위대해질 순간도 있긴 하겠지만 대부분은 느리고 소소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나는 어깨에 힘을 빼고, 오점 가득한 나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일상의 리듬에 몸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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