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노트
디폴트 값(default value)은 사용자가 별도로 값을 지정하지 않아도, 컴퓨터 시스템이 자동으로 주는 기본값을 말한다. 초기값 그러니까 조금 확장하면 디폴트는 나보다 먼저 태어난 것들 중 어떤 것들은 내가 태어났을 때 나에게 초기값이 된다는 말이다. 나 또한 나보다 늦게 태어난 세상의 모든 동생들에게 디폴트값이 될 수 있다.
이 생각은 키워드 없이 도서관 서가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무심코 집어 든 한 책에서 시작한다. 거기엔 저자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서점가라고 쓰여 있었다. 서점가? 이게 뭐지? 하다가 나는 새로 붙여진 이름일 것이며 서점을 하는 사람일 거라고 추측하였다. 작가, 화가, 음악가, 작곡가 등등의 직업군처럼 서점을 하는 사람을 서점가라고 부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창의적으로 틈새를 노려 명명하길 좋아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호명하되 아직 쓰인 적 없는 단어를 사용하기를 즐긴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처럼 읽히기도 한다. 카메라를 사면 처음 설정값을 디폴트라고 하듯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단어들과 개념들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나보다 먼저 생겨난 개념일 텐데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어색한 서점가라는 말은 시간이 흐르면 하나의 직업을 가리키는 말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태어났을 때 그것이 이미 있었다는 이유로 그것을 일종의 원래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들었다.
언젠가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작성법>이라는 책에서 그런 내용을 보았다. 논문을 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책을 쓴다고. 그러면서 대학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에 비해 그리 길지 않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디폴트였던 대학이라는 것이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나에게 대학은 고민 없이 우리가 통과하는 어떤 제도라고 원래부터 그러한 것으로 말이다. 요즘은 유튜브나 많은 미디어들이 넘쳐 나고 사이버 대학도 성행하고 있다.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모르지만 내가 느꼈던 대학이라는 존재의 크기는 이제 좀 작아지고 있지 않나 싶다.
대학도, 어떤 직업도, 더 큰 시스템도 원래 그러한 것이 아니고 선배들의 생각이 모여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고, 그러한 흐름은 속도가 빠르기도 느리기도 하다. 나는 요즘이 그중 속도가 빠른 시기로 접어들었음을 느낀다. 나에게 디폴트가 후배들에게는 디폴트로 남아 있지 않는다. 불과 몇 년 전에 신조어가 이제는 사전에 등재되기도 일상어가 되기도 한다. 원래 그러한 것이 없듯 영원히 그러한 것도 없다. 흐름 속에서 내가 건져 올린 몇 가지 단어들로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다 보면 나는 어느새 나이 들고 시간은 흘러 있다. 이때 내가 어떤 단어들을 건져 올려 필터링하는지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한다. 한 번쯤 떠올려 쫑긋해 볼 일 아닐까? 나의 디폴트들은 언제부터 그러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