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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돌아, 정리

작업노트

by 에티텔
hug-passion.jpg 이효연, hug_passion, 종이에 수채, 2023

정리를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으로 분류한다면 나는 정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 쪽으로 분류될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정리 못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메일함이며, 책상 서랍, 수납공간 등 나를 둘러싼 주변을 볼 때 어느 것 하나 똑 부러지게 정리해 본 적이 없다. 메일함은 점점 그 용량이 커져 유료 서비스를 받고 있고 작업실은 넘쳐나는 물건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나의 우유부단한 습성은 매사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하고 어딘지 뜻뜨미지근한 느낌을 주며 삶이 가볍지 못하게 한다.


재밌는 건 반대로 그림을 그릴 때면 그 성격이 반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는 왜 이토록 대상들과 그것을 둘러싼 배경들의 경계에 신경이 곤두서는지 모르겠다. 늘 칼로 자른 듯 반듯하게 구분을 지어야 뭔가 그려낸 느낌이 드니 말이다. 학생들을 가르칠 땐 칼 선을 긋기로 유명했다. 손으로 붓을 쥐고 그은 선이 자를 대고 그은 것 마냥 반듯반듯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나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칼처럼 끊어내는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회화적이지 않고 디자인 같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림 안의 대상과 대상의 경계를 무디게 하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일부러 경계를 흐리게 하거나 이것과 저것 사이에 중간톤을 많이 그려 넣는 등 여러 방법으로 궁리를 했다.

me and I.jpg 이효연, 나와 나, 아사에 유채, 116.7x91cm, 2021

그렇게 경계를 흐리게 하려고 노력한 지 10년쯤 흐른 것 같다. 오늘 모처럼 그림이 유연하게 정리가 되어 흐뭇했는데 나의 외곽선 정리벽이 많이 그림 속으로 스며든 것을 발견했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그림에서 정리란 대상과 배경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주인공과 나머지로 파악하고 주인공에 온신경을 집중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이 훈련을 거듭할수록 정리라는 것은 나설 자리와 물러설 자리를 알고 서로에게 스미는 공간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림에서의 정리는 관계에 대한 나의 태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과 저것, 주인공과 배경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 사이에 원근이 있는 것이다. 원근도 따지고 보면 나의 위치를 기준으로 앞과 뒤가 생기는 것이므로 모든 것은 유동적이다.


세상에 앞과 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 가질 것과 버릴 것 등 정리벽은 벽이기도 하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닮았다.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끊어내는 것도 이상적이지 않다. 언젠가 들었던 강연에서 강사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물 한잔을 들고 있을 땐 나와 물이고 그 물을 마시면 물은 내가 된다고. 그렇다. 물은 물이 되기도 내가 되기도 한다. 이제 경계란 이편과 저편을 오가는 유동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먼 길 돌아 하나씩 자연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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