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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

작업노트

by 에티텔


“내 삶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친구의 전시를 보러 갔다가 맥주를 한잔하는데 친구가 그렁그렁한 눈을 뜨고 해준 말이다. 사실 이 말은 오래전에 내가 그 친구에게 했던 말인데 친구가 소중히 기억했다가 나에게 돌려준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가장 많이 알고 기억한다. 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와 경험과 이야기를 담아 간다. 누구나 각자 특정 부분을 조명하기도 하고 기억하거나 기록하기도 하며 삶을 영위해 간다. 그렇게 볼 때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 혹은 더 섬세히 조명하는 것은 작업이기도 하고 동시에 삶이기도 하다. 오늘도 어느 전시장에서 기억과 분투하는 작업 앞에 잠시 서 있었다.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이 공유한 타인과 일정부분 비슷한 기억을 갖는다는 얘기를 설치작업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기억이란 것 거기에 대해서라면 나는 정말 할 말이 많다. 이제는 더 이상 어색할 것도 없을 만큼 망각은 나의 벗이 되어버렸지만 기억이 망각이 되고 왜곡되고 굴절되고 사라지고 편집되는 과정을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재밌는 것은 기억은 붙잡으려 할 때 바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른 일에 열중하면 스르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점에 대해 나에게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은 드물 것이다. 기억은 나를 지탱하는 내 생각과 역사의 주춧돌이기도 하고 하나씩 지워지는 것은 쓸수록 닳아 없어지는 비누와도 닮았다. 그 중에서도 기억의 맹점은 왜곡되고 굴절된다는 사실인데 거기서 변수를 모른다는 점이 바로 우리를 어려움 앞에 서게 한다. 기억은 상수와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 왜곡이 일어나는 굴절정도와 시작되는 좌표를 몰라서 우리는 언제나 혼돈 속을 산다.


기억하는 한 나는 자유롭고 또한 집착한다. 집착은 괴로움의 대명사 중 하나다. 집착이 나로 하여금 작업하게 하지만 나를 놓아주지 않으니 집착할 밖에 도리가 없다. 오늘도 나는 가장 온전한 나를 위해 집착하고 작업한다. 이 때 질문 하나가 피어오른다.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정말 진실이었을까? 사회가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정말 온당한 상식일까?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던 사회의 상식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상식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따라야 그것이 상식이 된다.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은 오해되지도 않고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회적 믿음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렇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기포가 올라오듯이 조금씩 품어왔던 의심들을 작업에 녹여내어 나자신과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싶다. 기억과 기억 사이의 틈에 상상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키우면 어떨까? 그러다 보면 상상은 다시 기억의 나무 언저리에 뿌리를 내리고 기억과 함께 자라나게 될 것이다 기억을 딛고 상상이 자라나고 다시 상상은 나를 이루는 구성성분으로 자란다. 그렇게 엉켜 자라나는 기억과 상상은 또다른 기억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내 삶을 온전히 아는 건 정말 나 밖에 없을까? 그건 기억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는 누구도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에 대해서는 일정의 기울기를 가지고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때 우리가 경험한 것은 서로 다른 생김새의 믿음이 된다. 믿음은 많은 것들의 주춧돌이 된다. 그러나 그 믿음이 그러한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 보는 건 어떨까? 미국에 사는 친구의 아침은 이 곳의 나에겐 밤이다. 내가 선 자리에 따라 그와 나는 각자의 기준을 갖는다. 기록해 두고 다시 보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나의 역사일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내 삶에서 내가 승자가 되는 것은 내가 얼만큼 나의 기억을 보관하고 이해하고 성장시키는 지에 달려 있지 않을까? 우리모두는 저마다의 영화에서 감독이자 주인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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