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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원을 그리며

by 에티텔
where the sly begins.jpg 이효연, Where the sky begins, 캔버스에 유채, 30x24cm, 2025


힘을 내려놓는 순간, 나는 무엇을 그리고 싶을까.
이 물음을 오래 품어왔다. 수많은 ‘그럼에도’들이 쌓여 결국 나는 사람과 풍경으로 돌아왔다. 전시에 참여할 때마다 그림에 작은 이야기를 덧입히곤 했다. 그것은 일종의 안도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야기가 잠시 숨을 고르는 자리에 머물고 싶었다. 계획도 줄거리도 없이 앉아 있을 때, 나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어떤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가.


‘그림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아득하다. 오래전부터 회화는 죽었다는 선언을 들어왔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회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겨 다른 호흡을 하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죽음의 선언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회화가 어떻게 남으려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번 작업에서 나는 시선 자체에 주목했다. ‘무엇’과 ‘어떻게’를 붙잡지 않고, 눈앞에 드러나는 것에 마음을 두었다. 윤곽보다 그 안의 숨결을, 장면의 여백과 시선의 흐름에 오래 머물렀다. 손끝이 천천히 선을 긋는 동안 풍경은 느리게 모습을 드러냈고, 인물의 표정은 설명 대신 이미 지나간 순간의 흔적으로 남기를 택했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큰 원을 그리듯 같은 자리를 다시 지난다.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축적이다. 선의 굵기, 색의 온도, 여백의 호흡이 매번 달라진다. 그 작은 차이들이 내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남은 길을 말해준다.


계획이 없는 상태는 공허가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작은 것들이 또렷해진다. 벽에 남은 빛의 잔상, 먼 풍경의 떨림, 새벽 공기의 온도. 나는 이 신호들을 모아 화면 속에서 서로 만나게 한다.


결국 묻고 싶다. 힘을 빼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말을 건네게 하는가. 그 말들 사이의 고요한 틈에서 회화는 여전히 숨 쉬고 있는가.


나는 그 숨을 믿고 싶다. 작은 원을 한 번 더 그리며, 다음 호흡을 기다린다.



헤이리 판 페스티벌 2025 에서 행사 중 연계 프로그램으로

아트 페어가 열리는데 참가하며 작업노트를 적어보았습니다.

기간 : 9.19.(금) - 9.28.(일) 장소 : 헤이리 예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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