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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풍경

by 에티텔
Mindscape2-web.jpg 이효연, Mindscape 2, 아사에 유채, 112x145.5cm, 2013

그가 말했다. “보는 만큼 그리는 거야.”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그 말은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 과거의 시간들을 불러냈다.

보지 못해 그리지 못한 날이 있었고, 충분히 보았는데도 손이 멈춘 날이 있었다. 형체가 뿌옇게 뭉쳐 보이는 날, 모든 것이 선명한데도 손이 떨려 캔버스에 다가가지 못한 날도 있었다. 겉으론 멈춤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보지 못함’이 만든 빈자리였다.


‘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다는 건 언제나 멀게 느껴졌다. 시간과 비용, 인내가 필요했다. 그 틈새로 마음의 온도가 스며들었다. 창밖으로 흘러내리는 아침의 빛, 식어가는 커피, 거리에서 스쳐간 사람을 그리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해 흘려보낸 오후. 빛과 시간, 그리고 온도가 어긋날 때, 사물은 또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서른 해 가까이 ‘보이지 않는 것들’로 시간을 채워왔다. 그것은 실패와는 달랐다. 실패는 원인을 말하지만, 보이지 않음은 층층이 쌓여 구멍을 만들었다. 어린 습관, 익숙함의 편견, 스스로에게 던지지 못한 질문들이 시야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그래서 나는 구멍을 더듬듯 그리기 시작했다. 붓끝으로 가장자리를 훑고, 눈으로 그림자를 좇았다. 더듬는 일이 작업의 반이었다. 오래 본다고 해서 곧 이해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다. 사물은 처음에는 단순하다가도, 오래 바라보면 낯선 결을 드러냈다.


때로 사람들은 난처함을 감추려 화분을 두거나 장치를 마련한다.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다.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나는 그 얼버무림이 더 슬펐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덮어두는 방식이었으니까.


끝까지 따라간다는 건 단순히 오래 보는 일이 아니다. 다시 묻고, 해체하고, 또 묻는 일이다. 나는 같은 의자, 같은 창틀, 같은 손을 계절을 달리해 반복해 그렸다. 반복은 집착처럼 보였지만, 결국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다.

나는 묻기 시작했다.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향유하는가.


뒤늦게 알게 된 건, 보는 일이 단순히 눈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빛 아래 있는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가 시선을 결정했다. 같은 풍경이라도 낮과 밤, 초점의 깊이, 관점의 높이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졌다. 보는 이는 언제나 불완전한 망원경을 든 존재다. 기억과 취향, 교육이 렌즈처럼 겹쳐 있기 때문이다.


보지 못했던 것은 내 눈의 한계가 아니라, 조건의 문제였다. 그 깨달음 이후 ‘본다’는 행위는 욕망이 아니라 질문이 되었다. 어떤 물음에서 관찰은 시작되는가. 그 물음이 작품의 출발점이자 일부가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잘 보이는 자리를 찾지 않는다. 자리를 옮기고, 빛을 바꾸고, 관점을 뒤집는다. 때로는 불편한 자리를 선택한다. 그 자리에서만 보이는 결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관찰의 조건을 드러내고 싶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남기고 싶다.


그래서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당신의 자리와 빛, 방향은 무엇을 말하는가.


화가는 전지전능한 관찰자가 아니다. 조건을 고백하는 서술자이자, 질문을 던지는 동반자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풍경은 더 넉넉해진다. 불완전함이 드러난 자리에서 연민이 생기고, 그 연민은 그림을 다른 쪽으로 이끈다.


나는 여전히 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이제는 답보다 질문을 더 소중히 여긴다.

나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여전히 보지 못하는가. 그 물음이 조용히 캔버스 위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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