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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붓질이 미끄러질 때

by 에티텔
mistaken illusion.jpg 이효연, Mistaken Illusion, oil on linen, 90.9x72.7cm, 2025

후회라는 말은 대개 시간이 부족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우리는 그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이유를 찾거나, 과정을 설명하거나, 혹은 애초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감을 앞두고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왜 항상 시간은 모자라고, 모자란 시간 앞에서 욕심은 오히려 또렷해지는 걸까.


그림을 시작할 때 나는 종종 조금 무리인 방향을 택한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방향이 아니면 이 작업이 나를 속이게 될 것 같다는 기분 때문이다. 첫 붓질이 어긋나는 순간, 이 선택이 쉽지 않으리라는 건 금방 알게 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다. 방향을 수정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욕심을 내려놓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다. 그래서 결국 처음의 선택을 고수한다. 정확히 말하면, 고수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인다.


그럴수록 부담은 커진다. 결과에 대한 부담이라기보다, 이 선택을 내가 했다는 사실에 대한 부담이다. 이 지점에서 테크닉이 등장한다. 흔히 말하는 ‘잘하는 기술’이라기보다, 물러설 수 없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하는 기술에 가깝다. 여러 겹의 시간을 한 화면에 담기 위해, 나는 시간을 정리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겹쳐 두고, 남겨 둔다. 빠르게 지나간 순간과 오래 머문 망설임이 같은 자리에 놓인다.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후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더 이상 감정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태도가 된다.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화면 어딘가에 남아 있고, 나는 그것을 굳이 지우지 않는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성공이나 실패를 증명하기보다, 한 사람이 주어진 시간 안에서 어떤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을 어떻게 끝까지 데려왔는지를 보여준다. 후회는 그 이야기 속에 조용히 들어 있다. 크게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읽히는 방식으로.



내일 작품촬영을 앞두고 모든 가능한 것들을 최대한으로 동원하여 작업하다가 이 생각마저도 미끄러져 버릴 것 같아 잠시 기록해 두고 다시 훅하는 작업실의 열기 속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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