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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의 속삭임

Chromatic whispers

by 에티텔
allegory.jpg 이효연, Allegory, oil on linen, 116.7x91cm, 2025

허공을 올려다본다. 허공에 바람이 분다면 그것은 어떤 표정으로 존재할까. 표현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색채라고 부르고 싶다. 감정에 잠식되어 가라앉던 시간들, 나를 다시 표면으로 끌어올린 것은 색과의 단순한 놀이였다. 색은 이름보다 먼저 다가오고, 생각보다 먼저 감각된다.


한 화면을 구상하고 그리기까지 나는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감정의 선을 따라 몸을 기울인다. 그러다 문득, 내가 무엇을 그린다는 감각보다, 나라는 존재가 어딘가로부터 그려지고 있다는 이해에 가까운 기척에 사로잡힌다. 손끝이 먼저 다가가고, 의식은 뒤늦게 숨을 고르고, 색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문장의 파편처럼 스스로 제 위치를 찾아간다. 나는 그 얇은 질서에 간섭하지 않기 위해 더 천천히 호흡한다. 색이 먼저 알고, 나는 늘 한 발 늦게 도착한다.


어떤 색이 화면을 덮는 순간, 한 번도 말해보지 않은 문장이 빛처럼 스쳐간다. 말은 나타나기 전에 먼저 색으로 퍼지고, 색은 다시 낯선 공간을 열린 틈처럼 넘겨준다. 나는 그 틈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어도, 기다리다 보면 어느 장면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분명한 형체도 없이, 나를 먼저 설득하는 장면. 풍경이 사라지면 감정이 뒤늦게 남는다.


색을 사용할 때마다 아주 작은 균열음이 들린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그 틈으로 오래된 어떤 기척이 스며 나와 나를 바라본다. 내가 잊어버린 표정인지, 끝내 적지 못한 문장의 과거형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나보다 오래된 얼굴 하나와 마주 선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먼저 존재했으나 아직 이름을 가지지 못한 색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에서 내가 보여주려는 것은 완성된 장면도, 정리된 감정도 아니다. 작업 중에 생긴 틈, 아직 말해지지 않은 문장들의 어두운 껍질, 불완전함에서만 들리는 진동 같은 것들이다.

색의 속삭임은 소리보다 먼저 다가오고, 이해보다 먼저 스쳐 간다. 그 속삭임은 번역되지 않는 언어에 가깝고, 나는 그 의문을 유지한 채 화면 앞에 선다.


그 의문이야말로 내가 계속 그림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조건임을, 나는 아주 늦게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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