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델핀 페레 지음, 백수린 옮김 창비, 2023
『Le plus bel été du monde』 (2021)
이과는 아니지만 물리학 그중에서도 양자역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특히 마음을 끌었던 부분은 불확정성과 중첩성으로 시간과 공간을 보는 관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한동안 테드 창의 단편 <네 인생 이야기>와 이를 영화화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에 빠졌었다. 소설과 영화에서 등장하는 외계의 언어는 과거-현재-미래를 한꺼번에 표현한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는 말을 시작하는 순간 결말까지 미리 다 볼 수 있다는 마법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면서 상상 속에나 존재할 듯한 이런 시공의 개념이 현실로 다가왔다. 아이에게서 나와 내 부모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에 말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간을 살아왔으나 서로를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시간은 어쩌면 선형적으로 흐르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생각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에도 담겨있다. “준비 됐어?”로 시작하는 엄마와 아들의 여름 여행기. 모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시골집에서 한 계절을 보낸다. 조부모와 엄마 그리고 아이로 이어지는, 세 세대를 관통하여 서로 다른 시간이 하나로 연결되는 경험을 작가 델핀 페레도 했을까? 실제로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어느 장소에 있든지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가족의 추억이 깃든 장소를 통해 각자 다른 시간을 살았지만 앞선 사람들과 다음 세대가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작가의 생각은 수채물감과 펜으로 그린 120여 쪽의 그림들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백이 많고 투명하지만 쓸쓸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그림들은 시와 같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거기에 엄마와 아들의 사소하고 덧없는 대화의 편린이 곁들여진다
오래전 찬장 위에 두었던 사탕, 주머니에 가득 넣은 코르크 마개, 청딱따구리소리, 어린 시절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자리, 먼지 가득한 다락방, 할아버지가 잡아온 독 없는 뱀, 말라비틀어진 풍뎅이, 왼쪽만 남은 장갑들, 식탁아래 붙어 있는 껌처럼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의 소소하고 평범한 이야기들. 스쳐 지나가면 잊어버릴 만한 그런 이야기들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테다. 심심한 조각들이 모여 한 계절을, 유년을, 인생 전체를 이룬다. 독자는 작품을 통해 이 같은 시간들이 세대를 거듭하여 쌓인 흔적을 발견하고 시간에도 켜켜이 쌓이는 두터운 질감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여름을 보내며 아이는 만남과 헤어짐, 다툼과 나눔, 엄마와 추억 쌓기,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홀로서기 등을 경험한다. 그 과정에서 일상의 평범함을 즐기고, 사촌에게 아끼는 모자를 나눠주고, 할머니를 배려하는 마음 등도 갖게 된다. 혼자 신발끈을 묶지 못해 끙끙댔지만 한 계절을 보낸 뒤 아주 쉽게 그 미션을 달성한다. 아이의 몸과 마음이 쑥 자라났다. 함께한 어른도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이 계절은 또다시 한 겹 쌓여 미래의 누군가에게 전달될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말로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 답답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 관계를 이리저리 혼자 생각해 볼 기회가 많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관계가 또 있을까?’ 동시에 나의 부모도 떠올랐다. ‘나’라는 존재는 ‘나’에서 머무르지 않고 위 세대와 아래 세대로 이어지며 공존하는 게 아닐까, 아이를 통해 과거가 미래로 전달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에 있는 자그마한 존재들에게서 동시에 재현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우리가 태어나 죽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사실 계속되는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품 속 아이와 엄마가 보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이 늘 우리를 스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