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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Oct 26. 2024

"바다를 선물하세요"

『할머니의 여름휴가』

『할머니의 여름휴가』안녕달 그림책, 창비, 2016 







얼마 전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엄마.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사람의 시간만큼 변하지 않을 듯하면서 눈 깜짝할 새 흘러가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룻밤 자고 나면 새벽같이 일어나 식구들 뒷바라지를 하던 나의 젊은 엄마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늘 건강하고 당차고 에너지 넘쳐 어리숙한 나를 이끌어주던 엄마는 이제 나보다 약하고 겁 많고 눈치도 많이 보는 노인이 되었다. 늙은 엄마가 어색하듯 『할머니의 여름휴가』 표지 속 나이 든 여인과 수영복 그리고 바닷가는 어딘가 익숙하지 않다. 팔순을 바라보며 점점 어깨도 굽고, 고장 난 무릎에 금속을 넣어 걷는 게 힘든 나의 어머니가 표지 속 여인과 겹쳐 보인다. 



무더운 여름, 강풍 버튼이 고장 난 선풍기 그림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 나이 든 여인과 강아지 한 마리가 노인만큼이나 오래되어 덜덜거리는 선풍기 한 대로 여름을 나고 있다. 밥상에 놓여있는 약 봉투는 그녀의 건강이 나이만큼 수월치 않음을 짐작게 한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리며 반가운 손자가 찾아온다. 할머니에게 바닷가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며 바닷소리를 담은 소라를 선물로 준다. 귀에 대는 순간 할머니의 눈앞에 에메랄드빛 바다와 모래성이 펼쳐진다. 바람 한 점 없는 오후, 할머니는 옛날 수영복, 양산, 돗자리 그리고 수박 반쪽을 들고 강아지와 함께 소라 속으로 들어간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독자들에게 유쾌한 즐거움을 주는 작가 안녕달은 『수박 수영장』, 『왜냐면…』에서 보여주듯 『할머니의 여름휴가』에서도 무료하고 답답한 일상에 청량한 마법을 뿌려주었다. 소라에서 나온 할머니를 기다린 풍경은 바로 표지 속 드넓은 백사장과 쪽빛 바다. 바닷물에 몸을 담가 보고, 갈매기들과 수박도 쪼개 먹는다. 손자 녀석처럼 햇볕에 몸을 태우기도 하면서 한가로이 그녀만의 휴가를 즐긴다. 기념품 가게에서 조개로 만든 바닷바람 스위치를 사서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 고장 난 선풍기에 조개를 끼우니 바닷바람처럼 시원한 바람이 집안을 가득 채운다. 공기를 타고 신선한 바다 내음도 은은하게 날 듯하다. 첫 장과 달리 할머니의 거무스름하게 탄 피부를 보고 있으면 독자도 같이 휴가를 다녀온 것처럼 묘한 안도와 행복을 느끼게 된다.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연필 그림은 작가가 추구하는 모호한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표현하는데 제격으로 보인다. 화사해 보이지만 동시에 아련한 애잔함까지 느껴지는 것은 작품 속 그녀가 우리의 가족 혹은 미래의 우리 모습이기도 해서일까? 할머니가 왜 혼자 사는지,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작가는 그녀의 하루 중 몇 시간만을 공유했고, 여백이 많은 그림이나 영화를 보듯 읽는 이는 각자의 경험과 기억으로 나머지를 채워 상상해야 한다. 그래서 아련한 그림과 함께 비어 있는 이야기가 더 탄탄하게 느껴진다. 중간중간 만화처럼 분할 컷으로 이어진 그림들은 자칫 늘어질 수 있는 분위기를 가볍게 전환해 준다.



그림책 속 구부정한 그녀의 허리가 절뚝거리는 내 엄마의 무릎처럼 애처롭다. 몸이 둔해졌다고 마음도 무뎌지는 것은 아니니까. 아파도 여전히 바닷가에 가보고 싶고, 친구들과 여행도 하고 싶은 그녀들에게서 삶의 애착이 느껴진다. 빠르지 않지만, 느려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림책 속 기념품 가게에서 선물을 골라, 올여름 걷지 못하는 나의 아픈 엄마에게도 전하고 싶다. 속이 탁 트일 듯한 시원한 바다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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