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엄마에게』서진선 글/그림, 보림, 2014
어릴 적 아무 의미도 모른 채 흥얼거리던 노래가 있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1983년 6월 말부터 11월까지 138일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된 KBS1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주제가였다. 이 프로그램은 방송 시간만으로도 세계 최장 기록을 가지고 있을 만큼 화제였다. 방송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프로그램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유명세와 달리, 출연자들이 흘린 한 맺힌 눈물의 의미는 이제 점점 흐릿해지는 듯해서 안타깝다. 서진선 작가는 그림책 『엄마에게』를 통해 잊고 있었던 이산가족의 고통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수준에서 담담히 풀어냈다.
바다가 보이는 옥탑 방 마당. 작은 아이가 서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 사이에서 누군가를 그리는 듯한 어린아이. 아이의 옆에는 초라한 집과는 달리 화사하게 아름드리 피어 있는 화단이 있다. 집 근처 영도라는 지역명이 보인다. 이렇게 표지 그림을 찬찬히 읽고 난 독자는 이곳이 한국 전쟁 발발 이후 부산시가 피난민들에게 제공했던 정착지 중 하나, 영도임을 알 수 있다. 아이의 가족은 어디에 있을까? 배경으로 짐작 가능한 그 일이 아이에게 일어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표지를 넘긴다.
평양에서 태어난 주인공 가용은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그리고 5형제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생전 처음 본 비행기가 신기했지만 이후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예측할 수 없었다. 여름에 시작한 전쟁은 겨울이 오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백만이 넘는 중공군이 내려온다는 소문까지 돌자, 가용의 가족은 피난길에 오른다. 어린아이들과 함께 엄마가 먼저 길을 나섰고,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는 집을 지키기로 했다. 가던 중 아빠의 겨울옷 보따리까지 가져온 사실을 알고 둘째 가용이 그 짐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온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아빠는 남쪽으로 향했고, 금세 엄마와 나머지 형제들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이후 영영 헤어져 다시는 같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드라마 같은 비극이 그 시절에는 어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전쟁 때문에.
의사였던 아빠는 부산에 내려오자마자 천막을 치고 전쟁으로 인한 환자들을 돌봤고, 어린 가용은 엄마가 즐겨 부르던 ‘봉선화’를 부르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 있는 친척을 통해 엄마의 소포가 도착했다. 어린 동생들이 얼어 죽을까 다시 집으로 돌아간 엄마. 엄마의 사진과 봉선화 씨앗 그리고 엄마가 불러서 녹음한 ‘봉선화’ 녹음테이프가 소포 안에 있었다. 이제야 독자는 알 수 있다. 부산 피난처 옥탑 방구석에 흐드러지게 핀 그 꽃이 봉선화였음을. 그리운 엄마, 가족, 고향이었음을. 엄마가 보내준 봉선화 씨앗을 애지중지 키웠을 아이의 마음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작가는 맨 첫 장과 마지막 장에 아이의 가족사진을 넣어 전쟁이 앗아간 것이 무엇인지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피난길에 오르기 전 집 마당의 봉선화와 부산에서 아이가 정성스레 가꾼 봉선화 화단의 대비도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 주인공 가용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평생 의술을 펼친 장기려 박사의 둘째 아들이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는 현 건강보험제도의 기틀을 세운 청십자의료보험을 창설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야기의 초점을 장기려 박사가 아닌, 당시 엄마 품이 너무도 그리웠을 어린 가용에게 맞췄다. 작고 어리다고 슬픔과 고통이 덜하다 말할 수 있는가?
제목만 보고는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이 책을 처음 읽은 날, 한쪽 손엔 책이 다른 쪽 손엔 7살 첫째 그리고 가슴엔 막 돌이 지난 둘째가 아기띠에 안겨 있었다. 증간쯤 읽었을 무렵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 주저앉아 통곡을 했고, 멀리서 있던 남편이 무슨 큰일이 난 줄 알고 달려왔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전쟁은 그저 머릿속에만 있는 막연한 개념이었다. 아이의 말로 거창할 거 없이 단순하게 풀어낸 글과 그림은 실체 없는 전쟁을 눈앞에 또렷하게 그려주었다. 그제야 진정한 전쟁의 민낯을 보았다. 우리가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당장 통일이나, 눈이 보이는 정치적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함만이 아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이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 때문이다. 엄마처럼 고운 봉선화를 평생 마음에 새겼던 가용의 눈물을 잊지 말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