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날이 추우면 집에 있는 게 좋다. 방 안에 들어앉아 고구마라도 까서 먹어야 하겠다. 허나 고구마는 사치. 손에 닿는 아무 거나 쥐어 천천히 입에 가져간다. 소파에 드러누워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의 따스함을 느낀다.
며칠 전 길을 걷는데, 갑자기 싸늘한 느낌이 온몸을 스쳤다. 이런 류의 추위는 한국의 것과 성질이 확연히 다른 것이라 자연스레 파리의 겨울을 떠올렸다. 유난히 추웠던 그때.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이라면, 공원의 한가운데서 멍하니 서있던 나를 커다란 나무줄기들이 둘러싸던 그곳의 이미지다. 나의 시선은 나무줄기를 따라 하늘을 향했는데 무엇을, 누구를 생각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냉정하게 판단해 그 유학시절이 그리 좋았을 리는 없었을 텐데, 한편으로는 그때가 그립다. 인간은 과거를 미화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나 자신도 모르게 좋은 경험의 양이 힘들었던 경험의 양보다 많았을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습한 추위가 내 여행 욕구에 불을 지핀다. 프랑스를 생각하고, 그러다 보면 유럽을 생각한다. 또 아프리카를 생각한다. 점점 지평을 넓혀 아시아, 아메리카에 생각이 다다른다. 여행을 자제하자는 나의 지난 다짐은, 오늘도 이렇게 조금씩 흔들린다.
나의 지인 J가 얼마 전 말했다.
"나는 여행을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그가 얼마나 여행을 좋아하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먹었다. 평소 허투루 말하지 않는 그의 성향을 보면, 그 말은 진실일 것이다.
내 삶에 있어 여행은 어떤 존재일까.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매우 중요한 것임에는 확실하다.
좋아, 여행은 중요해. 그런데 왜 이 녀석은 추운 날에 유독 나를 꾀어내는 것일까.
당분간은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하자고 나 자신을 설득시키는 중이다. 여행은 따스한 봄날에 하자고 말이다.
그... 그래. 봄날에. 봄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찾아올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