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가난한 곳 / 그의 슬픈 기억들
#1 - 모두가 가난한 곳
밥 엘 우에드에서도 그렇듯이 벨쿠르에서도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다. 아주 일찍부터 일을 하고 10년 동안에 한 사람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해버린다. 서른 살 먹은 노동자는 놀음의 모든 패를 다 잡아본 셈이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 사이에서 자기의 종말을 기다린다. (『결혼 · 여름』,<알제의 여름>, p.41)
카뮈의 집을 보고나서 벨쿠르의 거리를 쭉 걸었다. 그 때도 그렇지만 이 곳에서는 지금도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장소는 뭐니뭐니해도 카페다. 한국돈으로 200원정도만 내면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실 수 있는데,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몇 시간을 앉아있어도 뭐라고 하는 이가 없다.
대중적인 카페의 손님들은 모두 남자뿐인데, 카뮈의 시대와는 달리 이슬람 국가로 되돌아간 알제리는 대개의 공간에서 남녀가 구분되는데, 남녀가 함께 자유로이 드나드는 곳은 일부 장소로 한정되는 분위기다.
카페 안에 앉아 있는 이들은 급한 일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그들은 카페에 들어온 낯선 동양인인 나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나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받아들고 그들처럼 의자 하나를 차지했다.
카뮈가 말한 '자기의 종말을 기다리는 서른살의 노동자'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심한 노동으로 인해 손이 부르튼 이들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일꺼리가 불규칙한 일용직 노동자의 경우는 일이 없는 날에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남자들이 카페에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집이 좁은 경우 집 내부를 여자들에게 양보를 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여자들이 주로 밖에 나가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남자들이 밖으로 나와주는 것이다.
한 번은 벨쿠르의 또 다른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놓고 기다리는데, 카페 입구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니 알제리의 유명 축구선수였던 인물이 카페에 들어온 것. 그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하고 그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런 유명인사까지도 스스럼없이 주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곳이라는데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대부분 부자들은 이 곳에서 굳이 자신의 부를 드러내지 않는다.
카뮈의 시대에 벨쿠르의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한 학생은 거의 없었고, 카뮈 이외에 주목할 만한 경력을 쌓은 학생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뮈는 이 동네에 대해 불평 대신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오히려 그는 벨쿠르 동네를 최초의 학교처럼 생각했다.
온갖 인종과 잡다한 직종이 뒤섞인 동네 덕분에 카뮈는 그가 훗날 프랑스에서 만나게 되는 작가나 다른 지성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알제의 중산층 친구들조차 공유하지 못한 삶과 매일같이 조우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논리. 친구들에 의하면 그는 한 번도 온갖 계층 사람들과 편하게 대화하는 능력을 잃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마르크스로부터 자유를 배우지 못했다고 주장한 어느 비평가에게 카뮈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건 맞는 말이다. 내가 자유를 배운 것은 가난 속에서였다.
당시 그의 동네 벨쿠르 젊은이들의 대부분은 성인이 되어 반복되는 고된 노동을 견뎌내던가 악의 길로 빠지던가 그 둘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가난 속에서 자칫 악한 길로 빠질 수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꿈을 지켜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가 작가로서의 꿈을 언제 가지게 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언젠가 친구 마르그리트 도브렌 Marguerite Dobrenne에게 자신은 일곱 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꿈이 실현되기까지 그의 첫 번째 스승 루이 제르맹 Louis Germain의 역할은 그의 초기 인생에 있어 꽤 중요했다.
아버지의 얼굴도 본 적이 없던 카뮈에게 루이 제르맹 선생님은 선생으로서 때로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서 그를 이끌어주었다. 가난이란 출구가 없는 요새와 같은 것이라 했던가. 그런 상황에서 학교가 카뮈에게 기쁨이 되었다고 그는 소설 <최초의 인간>에서 고백한다.
보고 아는 것이라고는 지중해 지역의 동남풍인 시로코 바람과 먼지, 굉장하지만 금방 뚝 그치는 소나기, 해변의 모래와 햇빛을 받아 불타오르는 듯한 바다뿐인 그 아이들은... (중략)...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들을 교과서에서 읽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가까워진 무렵 선생님은 카뮈를 비롯한 총 4명의 아이를 불러 말했다.
"자, 너희들은 내가 가르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다. 나는 너희들을 중고등학교 장학생 선발 시험에 응시시키기로 결정했다... (중략)... 중고등학교에 가면 모든 문이 다 열린다. 나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기왕이면 너희들처럼 가난한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러자면 내겐 너희들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가 집안에서 이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대학 입시는 몇 살에 치는 거지?"
"6년 후예요."
집안의 주인이었던 카뮈의 할머니는 대답한다.
"똑똑하건 안 하건 내년에는 얘를 수습공으로 넣어야 해. 그래야 주급이라도 타 오지."
그 이튿날 집안의 허락을 받아온 다른 세 아이와 달리, 카뮈는 자신이 친구들보다도 더 가난하다는 느낌 때문에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제르맹 선생님은 카뮈의 집으로 찾아가서 할머니를 설득시켜, 결국 상급학교에서 공부를 이어가도록 허락을 받아낸다. 선생님은 과외비를 낼 돈이 없다는 할머니의 말에 '이미 카뮈가 다 냈다'라고 둘러대면서.
그리고 카뮈는 중고등학교 장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해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세계는 아름답다. (『결혼 · 여름』, <사막>, p.67)
#2 - 그의 슬픈 기억들
오늘은 카뮈가 겪었던 슬픈 기억을 주제로 하는 여행을 해볼 생각이다. 우선 벨쿠르 동네에서 영화관을 찾아야 했는데, 벨쿠르에서 알제 중심 방향으로는 영화관 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카뮈의 시대에는 벨쿠르만 하더라도 여러 개의 영화관이 있었지만, 지금은 알제 전체에 고작 몇 개의 영화관만이 있을 정도로 지금 이 곳에서의 영화 산업은 침체된 상황이다.
카뮈의 집에서 알제 외곽 방향으로 조금 나오다보면 과거 영화관이었던 큰 건물이 하나 보인다. 이 영화관 이름은 록시 Roxy인데, 카뮈가 할머니와 함께 갔던 영화관이 정확히 이 곳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무성 영화의 시대였는데, 영화가 상영될 때 행동의 의미를 설명해 주기 위한 글로 쓴 텍스트를 화면에 비춰주었다고 한다. 그의 할머니는 글을 읽을 줄 몰랐기에 카뮈에게 자막을 읽도록 했는데, 그게 카뮈에게는 비극의 시작이 된다.
그는 옆 사람들을 방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할머니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 때문에 마음같이 큰 소리로 자막을 읽을 수 없었는데, 그로 인해 내용의 반밖에 못 알아들은 할머니는 그에게 한 번 더 자막을 읽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더 큰 소리로 그걸 반복해야 했던 그. 옆에서 "쉿"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카뮈는 당황해 말을 더듬게 된다. 그러자 공포의 할머니는 그에게 야단을 쳤다.
어느 날은 어린 아이에게 복잡한 영화 내용과 계속되는 할머니의 요구, 옆 사람들의 잔소리 사이에서 난감해진 그가 마침내 입을 다물게 되는데, 할머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만 밖으로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는 그 불행한 할머니의 드문 즐거움 중의 하나와 그걸 위하여 지불한 그 아까운 돈을 허비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 울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한 번도 영화 구경을 가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글을 읽을 줄 모를 뿐더러 반 귀머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종교와 관련된 그의 슬픈 기억을 찾아볼 계획이다. 그의 영성체와 관련된 것으로 당시의 성당을 찾아보기 위해 빅토르 위고 가 Rue Victor Hugo 근처를 찾았다. 현재는 알 라흐마 모스크 Mosquée Al-Rahma로 사용되는 생 샤를 성당 Eglise Saint Charles이 눈 앞에 보였다. 참고로 이 곳은 성당으로서 1981년까지 유지되었는데, 대개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과거 성당이나 교회이었던 건물을 모스크로 전용하는 일이 많기에 사실 특별하게 볼 문제는 아니다.
집안의 가장이었던 할머니에게는 눈앞의 궁핍이 절실했기 때문에 종교와 거리가 멀었는데, 카뮈의 학교 공부 시간이 모자랄까 싶어 첫 영성체마저 시켜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카뮈의 손을 잡고 이 곳 생 샤를르 성당까지 찾아와 신부와 마주 앉았다.
3년 후에 성스러운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신부님의 말. 그러나 할머니는 당장 교육을 하지 않으면 영성체를 받을 수 없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결국 신부님은 카뮈가 속성으로 교육을 받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된다. 그렇게 교리강좌를 시작하게 된 그. 어느 날 친구들과 찡그린 표정을 짓는 장난을 치다가 키 큰 신부에게 들키고 마는데 , 그 신부는 그 장난이 자신을 겨냥한 것으로 오해한 나머지 카뮈의 뺨을 철썩 후려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카뮈가 가톨릭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으나, 근본적으로 카뮈의 생에 대한 철학이 가톨릭의 그것과 달랐기에 애초부터 그가 가까이하기 힘들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를테면 그는 죽은 다음의 세상은 없다고 보지 않았던가. 평생 동안 기독교로 귀의하도록 유혹을 받았지만 그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 카뮈는 영성체를 받게 된 날 평소보다 더 풍성한 식탁을 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는데, 할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니?"
모르겠다는 카뮈의 대답에 짜증을 참다못한 할머니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렇게 집 밖에서나 집 안에서나 그는 연신 뺨을 맞게 됐다.
그는 세례를 벨쿠르의 다른 성당에서 받게 되는데, 성당의 이름은 생 보나방튀르 성당 Eglise Saint-Bonaventure였다. 큰 거리 쪽에서 이 건물을 바라보면 성당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반대편에서 보면 영락없는 모스크인 기이한 형태의 변형된 건물이다. 다행히 이 곳에서는 그가 뺨을 맞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